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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륜과 인도를 아는 지성인 양성

천륜 : 보편성과 합리성

다원성과 독창성

천륜과 인도를 알고 실천하는 인간

성숙한 인간과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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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숙한 인간과 사회

성숙한 인간과 사회

학문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이고 우선적인 것이 보편성(universalitas)과 합리성(rationalitas) 이는 학문의 대상인 진리 자체가 어떤 특수한 영역이나 대상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어디에서나 인정되고 통용될 수 있는 보편타당성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보편성이 구체적으로 또 현실적으로 제한되는 상황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어디까지나 인간과 이 세상의 불완전성에 기인하는 것이지 궁극적인 진리의 특성은 언제나 보편성을 요구하는 것이다. 또한, 理致에 맞는다는 합리성은 바로 진리의 정의(定義:definition) 자체와 관련된 상식으로 합리성이 결여된 진리란 상상할 수가 없는 것이다. 동양의 오랜 문화전통 속에서 가장 크고 넓고 보편적인 개념은 하늘 천(天)으로 표현되어 왔다. 비록 하늘이 우리 경험의 테두리에서 구체적으로 보이고 느껴지는 자연현상과 自然天을 의미한다고 하더라도 그 이상의 의미 즉 易理天, 上帝天을 말하거나 自然天, 主宰天, 運命天, 物理天, 倫理天의 의미로 사용된다는 것은 일반적인 인식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하늘은 모든 것을 포용하고 다스리며 궁극적인 바탕이 되는 보편타당성의 의미를 강하게 지니는 것이다. 흔히 天倫이라고 하면 부모와 자식의 관계처럼 인간이 어쩔 수 없는 천부적인 인간관계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좀더 넓은 의미의 天倫은 "天地 自然의 道理"를 의미하는 天道 또는 "하늘에서 萬物에 주어진 것으로 本然의 道德性"을 뜻하는天命과 같은 맥락에서 궁극적인 眞理의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궁극적 진리인 천륜의 이해 아래에서 인간은 그 천부적인 지위와 평등이라는 보편적인 기본권을 향유할 수 있다.

즉, 窮極的 存在이고 眞理 자체이신 하느님(天主)의 모상으로 창조된 인간은 존엄하고 평등하며 자신의 삶을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자유와 지성을 갖춘 인격자의 고유한 권리를 누린다. 이러한 인간의 지성과 의지, 인격의 존엄성과 평등권, 삶의 선택과 행복 추구의 권리는 시간과 장소에 구애됨이 없이 언제 어디서나 보편적으로 추구해야 할 근본 가치이다. 이러한 근본 가치를 인정하고 밝히려는 것이 천륜이란 말의 우선적인 뜻이다. 교육을 통하여 지식을 전수하고자 할 때 가장 우선적으로 요구되는 것이 천륜을 믿고 따를 수 있는 인간을 만드는 지식이냐는 물음이다. 인간이 아무리 다양하다고 하더라도 天賦的인 윤리관계, 보편타당한 가치를 우선적으로 추구하지 않는다면 참으로 일치와 평화의 인간 세계를 구현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이러한 천륜을 지니고 그 덕목을 내면화시키는 사람이라야 세계시민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정신을 지니게 된다.

우리가 다양한 민족과 국가의 구성원임에도 불구하고 인류애로써 결속될 수 있는 것은 이러한 보편적 가치의 공유 즉 天倫을 통해서이다. 모든 인간은 자유롭고도 존엄한 존재이다. 인간은 과거, 현재, 미래의 누구도 그를 대신할 수 없는 영혼과 육신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각각의 특성을 지닌 고유한 인격체이다.

또한, 그가 하느님에 의해 "하느님의 모상대로, 하느님과 비슷하게" 창조되었고 누구에 의해서도 대체될 수 없다는 것은 인간 자신이 바로 창조주가 부여한 목적 그 자체임을 드러낸다. 따라서 인간은 어떤 경우에도 다른 사람이나 어떤 조직의 이용물 또는 수단으로 취급되어서는 안된다. 타인을 수단으 로 취급한다는 것은 곧 자신도 타인에 의해서 수단으로 취급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타인의 인간적인 존엄성을 부정할 때 자기 자신의 유일무이한 존엄성도 부정당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인간의 卑下 또는 인간의 비인간화는 하늘의 도리를 파괴하는 것이며, 인간의 존엄한 가치를 부정하는 것이다. 인간을 교육한다거나 인간의 지성을 계발한다는 것은 모두가 이러한 인간성의 파괴를 막고 인간의 존엄한 가치를 수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天倫에 따라서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를 지키고 보호하는 것은 우리의 일상적인 생활에서 뿐만 아니라 세계라는 무대에서 활동하게 될 때에도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이며, 세계인들의 상호 협력체제 아래서도 반드시 基本前提로 삼아야 한다.

천륜을 따름으로써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가 수호되며 자유롭게 됨과 마찬가지로 모든 인간은 천륜에 따르기 때문에 평등하다. 이것은 모든 사람이 같은 육체, 같은 힘, 같은 생활조건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같은 인간 본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아버지는 아버지다워야 하고 아들은 아들다워야 하며 스승은 스승다워야 하고 제자는 제자다워야 한다는 의미에서 그러하다. 이렇게 스승과 제자라는 인간관계의 측면에서는 인격적인 상호관계가 변함없다고 하더라도 학문적·기술적·기능적 측면에서는 제자가 스승을 능가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으며 배우고 가르치는 관계도 달라지는 것이다. 제자가 스승보다 뛰어난 실력을 지니게 되면 이미 그는 제자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다. 이렇게 모든 인간은 무한한 가능성을 지니고 자신의 삶을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이성의 힘을 평등하게 부여받았다. 우리가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살지 못한다면, 그것은 순전히 노력과 용기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기에게 책임이 있지 않은 것, 즉 인종, 출생, 지위 등에 의해서 차별을 받아서는 안된다. 그 자체가 인간성을 제약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평등이란 말은 차별의 철폐나 기회균등 등을 포괄하는 의미이다. 국가와 사회는 교육을 통하여 사회 구성원들에게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개발·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균등하게 부여할 때 정의롭다. 마찬가지로 세계인과 세계의 질서는 이러한 평등사상을 토대로 이루어질 때 천륜에 따른다고 할 것이며, 또한 정의롭다고 할 것이다. 모든 인간은 자유로운 선택에 의하여 자신의 삶을 스스로 살아갈 권리를 가진다. 인간은 무한한 가치를 지닌 영적 존재이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어떠한 이유에서도 수단화될 수 없다. 그리고 자기의 고유한 판단에 따라 자신의 삶을 계획하고 실천할 수 있는 자유로운 힘을 선천적으로 지니게 된다는 점에서 평등하다. 자유롭고 평등한 인간은 자기생활의 주인으로서 살아갈 권리를 가진다. 마찬가지로 모든 민족과 국가도 고유한 인권을 지닌 인간의 공동체인 한 자유와 평등의 원칙에 따라 아무도 침해할 수 없는 주권을 가진다. 첨단기술과 교통, 정보 수단의 발달로 세계가 하나의 생활권으로 통합되어 지구촌이 형성된 지금, 각 민족과 국가의 고유한 권리와 주권을 존중하고 보장하는 일은 정의로운 세계질서를 확립하는 데 기초가 되고 이러한 상호존중의 기틀이 될 수 있는 윤리원칙이 천륜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대구가톨릭대학교는 현시대가 요청하는 보편타당한 진리에 바탕을 둔 개방적이고 정의로운 세계시민의 양성을 지향하고 있다. 이는 자유, 평등, 인권과 같이 근대에 들어서면서 크게 부각되고 오늘날 점점 더 중요성을 인정받고 있는 인간의 존엄성이 가톨릭 정신의 핵심인 것과 같은 맥락이다. 이것은 또한 전 세계 가톨릭대학들의 공통된 목표이기도 하다. "진리의 근원에 무조건 자발적으로 헌신하는 것은 가톨릭대학의 영예이고 책임이다." "대학 생활은 진리를 열렬히 추구하는가, 그리고 젊은이들에게 또한 올바르게 행동하고 인류에게 보다 훌륭히 봉사하기 위하여 정확하게 사유하기를 배우는 모든 이에게 사심없이 진리를 전달하는 것으로 특징지워진다." 이것은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개인의 체험을 바탕으로 하신 말씀과도 상통된다.

"가톨릭 대학교는 내가 보기에 그리스도교의 정신이 모든 문화의 중심부 내에서 엮어내고 있는 창조력을 생생하게 드러내고 보증해 주는 표징인 것이다. 가톨릭 대학교는 변화하는 현대의 다양하고 풍요로운 상황 내에서 그리스도교 문화를 새로이 번창시킬 수 있다는 근거있는 희망을 나에게 안겨 준다.

우리 시대는 분명 심각한 도전에 직면하고 있지만 또한 진리와 사랑의 영이신 성령의 활동 아래에서 상당히 많은 것을 우리에게 약속하고 있다." 이것은 가톨릭대학과 여자대학의 역사에 잘 나타나 있는데 여자대학의 첫 건물은 서로 잘 알지도 못하는 극동 아시아의 한국 국민들을 위하여 유럽대륙의 오스트리아 부인들이 인간의 존엄성에 바탕을 둔 사랑과 봉사, 그리고 단식과 금육을 통한 희생으로써 모금을 하여 재정적인 지원을 함으로써 비로소 세워지게 되었던 것이다.이러한 가톨릭의 창학 정신은 그리스도의 구원 사업을 새로운 장소에서 새롭게 이어가는 새로운 구원 질서의 시작이었다. 한 사람의 인격, 하나의 빵조각도 소중히 여기는 구원의 창학 정신은 오늘날 후학들의 교육에 뿌리깊게 새겨져 있다고 볼 것이다. 역사는 단순한 과거의 사실만이 아니다. 어떤 존재가 역사를 가지고 있다면 그 역사는 그 존재 안에 살아있는 것이다. 과거 선목신학대학이나 유스띠노 신학교 같은 가톨릭대학이 현재의 대구가톨릭대학 안에 살아있고 과거 여자대학이 오늘날의 대구가톨릭대학 안에 살아있다. 이렇게 과거의 역사는 죽어서 없어진 것이 아니라 형태와 내용을 달리하면서도 변함없는 천륜에 따른 인간성 교육의 자리로서 살아있는 것이다. 이것은 비교적 짧은 대학교육의 역사에서뿐만 아니라 기나긴 인류 역사를 통하여 한국의 전통문화나 세계의 문화전통 속에서 계승되어 온 가치들을 오늘에도 이어받아 창조적인 발전을 꾀하는 것이다. 하위 사회(sub-society)로서 대학은 그 전체사회의 주된 역사 및 문화 발전과 제도를 함께 한다.

역사적 생성물로서 사회는 그 사회 구성원에게 각종 제도를 통해 문화와 역사를 내면화시킨다. 인간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존재가 아니라 부모에 부모를 두고 스승에 스승을 두면서 언제부터인지 모를 그 시점부터 계속 성장, 발전해 온 것이다. 인간은 이렇게 형성된 전통과 문화를 지닌 사회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넓은 의미의 문화전통을 계승해 나가야 할 소명을 지니고 태어났다. 그래서 인간을 역사적 존재라고 하는 것이다. 인간은 동시에 전통과 문화를 시대와 상황에 맞게 재창조할 수 있는 능력도 가진다.

특별히 영원한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천륜을 거스르지 않는 문화라야 계승과 재창조의 기회를 얻을 수 있으며 順理를 따르지 않거나 파괴적인 전통은 쉽사리 소멸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교육을 통하여 인간은 자신이 만들어 놓은 문화에 대한 역사적 반성을 하게 되고 주어진 삶의 참된 의미를 추구해 나간다. 그러나 전통과 문화의 모든 가치가 언제 어디서나 바람직한 형태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고 심각한 도전과 갈등을 초래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기 때문에 천륜이란 보편타당성의 원칙에 따라서 그 문화전통의 아름다움과 진실됨, 그리고 윤리성을 검토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서 항상 지속적으로 검토되고 새롭게 모색될 수밖에 없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천륜에 따라서 인간답게 산다는 것도 인간 안에 프로그램화된 조물주의 창조 목적이 성취되어 가는 참된 삶의 과정에서 그 의미와 가치를 되새길 때 가능한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전통적 가치와 새로운 가치가 뒤섞여서 혼란을 일으키고 있는데다가 외래의 가치들마저 무차별하게 유입되는 복잡한 시대에 놓여 있다. 세계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 교육의 모든 분야에서 하나의 지구촌을 형성해 가는 개방 사회로 진입하고 있는 지금, 역사와 전통을 통해 드러난 천명에 따르는 생활, 새로운 시대상황에 맞는 참된 삶의 방향 정립은 절실한 시대적 요청이다.

새로운 삶의 방향 정립은 보편타당한 가치를 지니는 고유한 전통을 살리며 창조적인 계승을 해나갈 수 있을 때 가능하다. 인간은 유일하게 사고할 수 있고 질문할 수 있는 문화사상과 역사의 존재이다.옛 것을 묻고 익히고 모방하는 가운데 익혀진 수동적 학습내용은 서서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능동적으로 변할 수 있으며, 배우고 익혔던 것에 새로운 의문을 품고 질문을 던지며 비판하게 됨에 따라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데까지 이르게 된다. 과거 문화의 유산들 가운데 가치가 있는 것들은 분명히 인간과 자연의 이치에 맞고 또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이므로 전통적인 것을 올바르게 배우고 깊이 있게 사색함으로써 보편적인 진리에 이를 수 있는 편견없는 이해가 가능해진다. 이러한 천륜의 이해를 통해서 새로운 가치와 원리의 확립이 때와 장소에 따라서 구체적으로 실현되어 간다. "옛 것을 익혀서 새로운 것을 알게 된다."는 말은 바로 이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는 주어진 전통문화를 비판적으로 받아들여 자기 것으로 삼으며 자신의 인격을 형성하고 새롭게 전개되는 역사적 환경 속에서 끊임없이 사색하여 미래에 적합한 가치를 창조한다는 말이다. 결국 새로운 것의 창조는 이렇게 전통을 묻고 배우고 익히며 사색하는 과정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자연만물의 이치가 모두 앞뒤가 있고 인간 만사가 모두 先後가 있다. 인류의 모든 문화와 학문이 과거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창조는 전통의 아들이라고 할 수 있다. 새로운 시대의 창조 업적은 전통문화의 결실들을 내면화함으로써 시작되지만, 단순한 모방 행위가 새 창조를 이루는 것은 아니다. 전통적인 것에 대해 새로운 관점과 여건에 따라서 비판적으로 묻고 분석하고 해결책을 모색하지 않는다면 창조나 개혁 또는 발전도 가능하지 않다.

그래서 전통과 창조를 매개하는 것은 연구, 사색, 의문, 새로운 해답의 추구, 검증을 통한 노력, 실제 생활경험을 통해서 느낄 수 있는 체험 등 한마디로 교육이라 할 수 있다. 교육은 역사의 산물인 전통을 중요시하면서 시간이 흘러 역사 퇴적에 따른 사회적 변화가 일어날 때에는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수밖에 없다. 역사와 사회가 바뀌면 당연히 그 시대와 사회에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것이 등장해야 하는데 이 때에 교육의 기능이 최대한 발휘되어야 하고 이 교육의 기본 골격을 이룰 수 있는 지침,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고 미래를 내다볼 수 있게 하며 특정 지역만이 아니라 세계 어느 곳과도 상통할 수 있는 보편타당한 진리, 인간과 자연의 이치에 부합하는 가르침, 모든 것을 포용하는 절대적 진리, 천륜의 방향 제시가 절실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천륜을 아는 전통의 창조적 계승은 나 자신과 온 세계가 언제나 염두에 두어야 할 현재의 과제이다. 천륜에 맞는 올바른 전통은 새로운 시대와 역사의 비판을 받아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태어난다. 반면 부분적으로 천륜에 어긋나고 일시적인 번영을 누리던 문화의 양상들은 역사와 함께 사라지는 운명을 면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편타당성이 없고 이치에 맞지 않지만 우연히 득세하게 된 문화의 어떤 요소들을 우리는 인습이라 부르며 새로운 역사의 창조와 함께 청산해야 할 과제로 보는 것이다. 참된 문화전통이 폐기되는 것이 아니라 늘 새롭게 재창조되어 전수된다면 불편한 문화의 유산인 인습은 새로운 창조의 활력을 잃고 사라지는 것이다. 전통이 항상 살아남는 현재라고 한다면 인습은 청산되어야 할 과거의 것이다. 전통이 개혁되어 현실 생활 속에 살아 숨쉬는 것이라면, 인습은 소멸하고 퇴화하는 것이다. 참다운 전통은 인습의 타파와 전통에 대한 비판적 반성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변화된 상황에서 스스로 변하는 전통만이 계승의 가치로서 생명력을 가진다. 이러한 전통과 인습의 척도가 되는 것도 바로 천륜이다. 대구가톨릭대학교는 천륜이라는 말로써 예로부터 전수되어 내려온 역사적 가치들과 문화적 전통의 창조적 계승에 중요한 관심을 두고 있음을 드러낸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역사의 주님이고 창조주인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가톨릭 정신의 주류를 이루는 것이며, 가톨릭교회 자체가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사도적 전승을 기반으로 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또한, 우리 "민족의 고유문화를 계승, 앙양하며, 세계 문화의 창조, 발전에 공헌"한다는 것은 홍익인간을 교육이념으로 하는 대한민국의 교육목적에 속하는 것이기도 하다. 위로부터 전수되어 내려오는 가르침이 아래에서 받아들여져 널리 보급되고 보다 나은 삶의 바탕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홍익인간"의 본래 의미이며, 동시에 하느님의 뜻을 따라 인류 구원을 위해 강생하신 그리스도의 인류 구원 사업을 계승하는 가톨릭교회의 목적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의 현재 삶은 역사적, 문화적, 사회적 전통과 더불어 끊임없이 새롭게 창조되는 구체적인 교육의 자리로 마련되는 것이다.

이렇게 교육은 縱的인 관계를 나타내는 천륜 안에서 전통과 창조라는 두 가지 특성을 동시에 지닌다. 세계의 문화가 세계인들의 역사를 반영하고 있다면 한 민족의 문화는 그 민족의 역사를 통하여 이루어진 삶의 지혜와 그 표현양식이다. 그러므로 세계로 발돋움하려는 현대 우리의 교육목적은 천륜을 바탕으로 하는 세계 문화의 습득과 더불어 우리 민족의 전통문화를 올바르게 지키고 살려나가는 것이다. 마치 오케스트라의 연주에서 여러 가지 다양한 악기들이 사용되지만 모두가 조화있게 한데 어우러지면서 지휘자의 뜻에 따라 움직이고 훌륭한 음악이라는 결실을 내는 것과 같다. 우리는 우리의 전통문화 속에 우리 존재의 正體性이 있고 우리의 정체가 뚜렷할 때에 세계 안에서도 의미있는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민족적 정체성과 역사성을 상실한 나라는 세계사에 참여할 수 없는 것이다. 천륜을 안다는 것은 하늘의 도리를 전하고 세계에 공헌할 수 있는 전통적 문화의 창조적 계승을 받아들이며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고 역사의 주인이 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기에 우리의 교육목표에서 가장 첫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천륜과 인도는 서로 떼어서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중용에 있는 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修道之謂敎(하늘이 명한 것을 일컬어 性이라 하고 성에 따르는 것을 일컬어 道라 하며 도를 닦는 것을 일컬어 敎라 한다)는 말도 바로 이러한 천륜과 인도의 상관관계를 말하는 것이다. 이율곡은 그의 {聖學輯要}에서 이 중용 첫머리의 말을 시작으로 학문과 수양, 정치와 생활의 근본 바탕이 되는 가르침을 시작한다. "聖人이 사람과 만물들의 마땅히 행해야 할 바를 토대로 차등을 매기고 재단을 하여, 이로써 모든 사람들에게 규범을 제시하였으니 이를 일러 敎라 한다. 예컨대 禮, 樂, 刑, 政 같은 것이 그것이다. 대개 사람들이 자기에게 性이 있는 것은 알지만 그것이 하늘에 來源이 있는 것임을 알지 못하고, 사물에 道理가 있는 것은 알지만 그것이 性에서 유래된 것임을 알지 못하며, 성인들의 가르침에 대해서는 알지만 그 가르침이 나에게 본래적인 것을 토대로 하여 차등을 매기고 재단한 것임을 알지 못한다.

이 때문에 子思가 여기에서 제일 먼저 이를 밝혀 놓았으니, 이는 董子의 이른바, '道의 큰 근원은 하늘에서 나온다'고 한 뜻과 같다." 사실 천륜이란 말이 넓은 의미로 天理와 天命, 天道, 天性 등 모든 것을 포괄하고 위로부터 주어지는 모든 근본원리 또는 가르침을 의미한다면 人道 역시 人倫과 人性 등 인간이 살아가는 모든 길을 표현하고자 한 것이다. 人道에 대한 사전적인 의미도 "사람이 지켜야 하는 도리"를 가리키며 "하늘에도 길이 있고, 사람에게도 길이 있고, 땅에도 길이 있다"(有天道焉, 有人道焉, 有地道焉)는 말을 하는 것처럼 인도는 근본적으로 인류생존의 길이라 할 것이다. 이 인도가 천륜과 같은 맥락에서 이야기될 때에는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어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이상적 인간의 모습이며 그 행동양식을 가리키지만 현실적으로는 대단히 다양하고 독특한 품성을 지닌 인류의 모습과 人情을 가리킬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천륜과 인도라는 말을 할 때에 "天倫"이라는 말로 하느님의 뜻과 위로부터 전수되고 널리 퍼지는 眞理의 보편타당성을 염두에 두었다면 "人道"라는 말로써 다양하고 독특한 人間性에서 유래되는 獨創性과 多樣性을 염두에 두고자 한 것이다.

사실 모든 인간, 민족, 국가는 각기 고유한 삶의 방식을 가진다. 이러한 삶의 방식을 우리는 문화라고 부른다. 모든 인간이 자신의 고유한 가치관을 가지고 자유로이 자신의 삶을 선택하여 살아나가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문화에 있어서 독창성과 다양성은 필연적이라고 할 수 있다. 독창적이고 고유한 문화를 갖지 못한 나라나 민족은 언제나 의존적인 삶을 살았고, 결국은 역사의 흐름에서 사라져 버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문화의 독창성이나 다양성을 강압적인 수단으로 억누르고 없애버리려고 노력한 세력들은 언제나 세상에 비극을 가져왔고 사람들에게 비참한 생활을 강요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제대로 교육을 받아서 참다운 인간성을 지니게 된 사람은 자신의 고유한 모습으로 지역사회와 세계무대에 당당하게 나설 수 있고 다른 사람들이나 단체들과도 공정하게 경쟁할 수 있는 사람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취향과 행동양식을 존중하고 나아가 다른 민족의 다양한 문화를 바르게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교육의 중요한 과제가 된다.

인간이 인간다운 삶을 살면서 세계인의 행복에 동참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인 자유에 바탕을 둔 독창적인 생각과 창조적인 상상력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천부적인 능력과 재능을 지니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사용할 수 없을 만큼 억압되어 있거나 개발되지 않는다면 가치가 없는 것이다. 사람마다 자신의 정신적인 능력을 개발할 수 있는 가능성이 무한하기 때문에 인간이 인간의길을 걸어가면서 독창적인 사고를 한다는 것은 바로 문화를 창조한다는 말과 연결되고 여기에 창조적인 상상력을 곁들인다면 문화의 온갖 색깔과 맛을 낼 수 있는 가능성을 넓혀나가는 것이다. 현재도 완전히 자유로운 것은 아니지만 과거의 규제와 억압을 벗어나서 마음대로 생각하고 생활할 수 있는 여유는 훨씬 많아진 편이다. 고대와 중세의 규범적인 통제들이 약해짐에 따라 근대에는 개인이 생각할 수 있는 자유가 넓어졌고 그로 인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 철학, 과학, 예술 등 갖가지 영역들이 폭넓게 분화되어 나가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같은 시기에 급격한 발전을 보이기 시작한 과학기술과 정보·통신 매체의 발달은 모든 것을 한데 묶어놓는 제한된 상황을 만들어 가기도 한다. 이러한 현상은 20세기를 넘어서서 21세기에 접어들면 더욱 더 심화될 전망이다. 세기의 전환기에서 미래를 전망해 볼 때, 21세기의 새로운 시대에는 정치, 경제, 사회, 가정, 문화, 학문, 종교, 윤리 등을 구분하였던 경계가 전자·통신 기술에 의하여 다시 무너지거나 적어도 불분명해지는 방향으로 변화해 가고 있다. 특히, 정치·문화나 종교·윤리로부터 독립하여 이윤추구의 원리에 따라 독자적 영역을 구축하였던 경제는 이제 모든 영역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며 과거에 정치나 종교가 행사하던 힘을 과시하고 문화의 중심을 차지하려고 한다. 또한, 과학과 기술은 본래 인간 지적 활동의 소산이었지만 점차적으로 인간 생활의 모든 영역을 지배하려고 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인간의 독창적인 사고와 창조적인 상상력이 고갈된다면 인간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기계의 노예로 전락할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더욱이 인간의 행복을 결정짓게 된 보람과 사랑에 가득찬 삶을 엮어나가는 인간 상호간의 교류도 정치와 경제의 그물에 사로잡힐 수 있고 또 자유롭고도 창조적인 문화에서 소외될 수 있다. 특히, 끊임없이 발전하는 산업사회는 고도의 과학기술과 합리적인 이성의 활용으로 인간의 사회활동과 모든 사회관계에서 합리적인 구조를 발전시키고 보다 더유기적인 일치를 도모하게 된다.

이제 후기 산업사회로 들어서게 되면 전 세계가 기술관료적 이데올로기에 의해서 정치, 경제, 사회 분야에서 기계적인 논리에 따라 획일화되는 보편화의 현상과 더불어 인간의식의 자유로운 창조력과 합리성에 의해 다른 각도로 표출되는 예술과 학문, 기타 문화적인 요소들이 민족적 특성에 따라 파편화 되는 특수화의 현상이 동시에 존재하게 된다.

과학과 합리성의 이름으로 의사결정 과정을 독점하면서 사회생활 전체를 프로그램화하는 기술관료 집단과 의사결정 과정에서 소외되어 자신의 주관적 기호에 따라 대량생산된 상품을 소비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대중 사이에 발생하는 갈등은 근본적으로 사회적인 갈등이며 동시에 '문화적 의미'에 대한 투쟁이다.

21세기에 도래할 새로운 사회는 생존을 위한 노동으로부터 해방되어 자기 존재의 의미와 가치를 추구하는 문화적인 노동으로 이행해가는 사회이다. 앞으로 기존의 획일화된 문화로부터 탈피하여 새로운 문화적 가치를 생산할 수 있는 국가가 결국 세계를 주도하게 된다면, 각자의 고유한 인간성을 바탕으로 하고 민족적인 특성을 전제로 하는 독창적 사고와 상상력은 21세기의 핵심적 덕목으로 부상할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각 민족의 고유한 문화는 전 세계의 기술관료적 이데올로기와 정치·경제적 획일화에 대항할 수 있는 문화적·사상적 항체로서의 가능성과 잠재력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일부 특정 종교의 광신적인 근본주의적 태도나 일부 민족들의 자기 우월감에서 비롯되는 힘의 논리에서 볼 수 있듯이 개인의 행복과 국제질서를 유지하는 보편적 규칙을 무시하는 일부의 사상이나 민족문화의 정치화는 또 다른 형태의 폭력을 잉태할 수 있다는 점을 경계해야 한다. 그러므로 21세기의 새로운 시대는 정치·경제의 보편성과 문화·예술의 고유성을 지혜롭게 조화시킬 수 있는 새로운 국제질서, 천륜과 인도를 바탕으로 하는 보편타당한 윤리규범을 요구한다. 또한, 현대라는 특정한 시기는 다양한 개성의 자기 실현을 필요로 한다. 현대는 국제화, 세계화의 시대라고 한다. 이 말이 각 개인과 민족의 문화적 다원성 또는 독창성에 대한 거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진정한 통일과 일치라는 것은 다양성을 무시한 획일적인 힘의 규제가 아니라 자유로운 생명력을 지닌 개체들의 다양한 요소가 조화와 안정을 이루는 "다양성 안에서의 통일성"을 의미하기 때문에 국제화, 세계화는 개인과 국가의 자유로운 개성이나 고유한 문화적 독창성에 대한 인정을 하나의 전제조건으로 요청한다. 국제화란 강대국의 간섭이나 패권적 세계지배도 아니고 또 선진국에 대한 약소국가의 정치적, 경제적 의존이나 문화적 식민지화도 아니다. 국제화 또는 세계화의 진정한 의의는 교통과 정보·통신의 발달로 하나가 되어 가는 다양한 문화들의 만남과 이를 통한 상호이해의 증진 및 협조에 있다.

물론 현실적인 국제질서는 힘의 논리가 지배하여 쉽게 정치적, 경제적 힘의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우리는 독재권력이나 제국주의 또는 나치즘과 파시즘의 역사적 경험을 통해 특정한 민족과 문화의 가치만을 인정하려는 어떤 절대적 권력도 결국은 파멸에 이르게 되었다는 사실을 배웠다. 따라서 國力의 增强과 競爭力의 강화는 정의로운 방법으로 추진되며 궁극적으로는 세계평화에 기여할 수 있는 합리적 규칙에 따라야 한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다른 민족과 국가의 독창성 및 문화적 고유성을 인정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 참다운 인격자는 자신의 고유성을 실현하는 세계인이다. 세계인이 된다는 것은 전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무조건 하나로 동화되어 로보트와 같이 기계화되거나, 자유로운 영성을 지닌 自我를 상실해 버리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개인과 민족의 고유한 차별성은 오히려 세계라는 무대 위에서 더욱 가치를 지니고 밝게 빛날 수 있다. 각자의 고유한 獨自性을 지닌 채 서로 다른 가치를 추구하는 다양한 개인과 공동체들이 天倫과 人道에 부응하는 인격 즉 '인간다움'이라는 하나의 보편타당한 가치를 실현하기 위하여 마련된 자리가 바로 세계라는 무대이다.

그러므로 참된 인간, 건전한 민족, 바람직한 세계인은 자기 실현을 위하여 다른 존재들을 억압하거나 악용하지 않는다. 인간다운 인간은 세계적인 보편성을 지니면서도 오히려 나와 타인의 다름을 인정하고 그 차이를 관용한다. 우리가 타인을 자기 실현의 보조자 내지 기본조건으로서 받아들일 때 비로소 정의와 평화를 이룩할 수 있다. 교육받은 인간은 이처럼 세계 무대에서 정의롭고 평화롭게 자기 실현을 성취할 수 있는 사람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대구가톨릭대학교는 人道를 강조함으로써 개인과 민족의 고유한 특성을 인정하면서 세계시민으로 나설 수 있도록 하는 교육목표를 설정하고 있다. 국제화와 세계화의 시대에도 올바른 인간관에 바탕을 둔 국가관이나 세계관뿐만 아니라 각 개인의 특성과 각 민족의 문화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며, 그로 인해 올바른 협력과 공존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국가나 민족간의 상호교류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다양한 문화적 체험과 개별적이고도 보편적인 가치들에 대한 체계적 연구는 개인의 인격을 존중하면서도 세계를 하나로 묶어줄 수 있는 공통분모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가톨릭 정신을 통해 인류행복을 증진시키는 사회를 건설하는 교육의 길이라 할 것이다. 또한, 대구가톨릭대학교는 人道를 중요시하면서 작게는 각자가 자신의 직업을 의미있는 노동으로 만들고 자신의 삶을 행복의 지름길로 만들 수 있는 독창적 사고, 크게는 정치적·경제적 획일화에 대항할 수 있는 새롭고도 풍요로운 가치를 탄생시킬 수 있는 상상력의 진작을 교육의 목표로 삼는다.

정보화와 세계화가 진전되면 될수록 자신의 능력과 자유로운 선택의 여유를 세계의 중심으로 만들 수 있는 독창적 사고는 지구촌의 자유로운 인간으로서 갖추어야 할 필수 덕목이다. 대구가톨릭대학교는 다양하고 독특한 교육매체와 교육방법을 개발함으로써 독창성을 살릴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고, 한 사람 한 사람의 무한한 상상력을 촉발시켜 각자의 고유한 삶을 완성시킬 수 있는 대화와 토론의 광장을 마련함으로써 독창적 사고를 생활화할 수 있는 교육을 실현하려는 것이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알기를 좋아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앎의 추구가 인간의 본성이라고 말하였다. 또 공자의 논어는 "學而時習之不亦說乎"라는 말로 시작한다. 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않겠는가라는 뜻이다. 이렇듯 인간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물의 이치를 따져 알기를 좋아하는 존재로 규정되고 있다. 동물은 오로지 본능에 따라 환경에 적응할 뿐이지만 인간은 이성적 사고와 판단에 따라 행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성적 활동의 결과물은 사회와 자연 현상의 원인에 대한 체계적 앎이다. "천륜과 인도를 아는 지성인"이라고 할 때 "아는" 것이 무엇인가? 단순한 지식만을 뜻함인가? 아니면 그 이상의 넓고 깊은 뜻이 있는가? 여기에 대한 사전적인 내용만 해도 상당히 다양하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천륜과 인도를 안다고 말할 때에는 단순한 사전적 의미나 일반적인 지식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깊고 넓은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것은 천륜이라는 말 자체가 무한한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라면 우리의 앎도 계시된 내용에 제한될 수밖에 없고 인도라는 것도 인간의 지혜와 깨달음의 한계 안에 있는 것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계시가 무한한 깊이를 지니고 있고 인간의 경험과 지혜가 무한한 넓이를 지니고 있다면 그에 따르는 앎의 한계와 내용도 거의 무한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대구가톨릭대학교의 교육목표는 눈앞의 현실에만 급급한 것이 아니라 세계적인 차원이고 궁극적인 차원에서 앞으로 미래사회의 발전을 내다보고 참으로 행복한 삶을 마련할 수 있는 앎을 추구해 나가는 것이다. 이러한 소명을 지니고 있는 것이 바로 지성인이라 할 것이다.
가. 인격

지성인이란 아직 완벽한 지혜를 갖추지는 못했다고 하더라도 인간의 고유한 능력인 知性을 소유함으로써 모든 것을 배우고, 알고, 판단하고, 느끼고, 표현할 수 있는 인격적인 존재를 말한다. 18세기 스웨덴의 과학자인 린네(Linne, Carl von)는 간단하게 "명확한 언어능력을 갖고 추상적인 추리를 행할 능력을 갖는 現生人類(homo sapiens)"라고 정의를 내리기도 했고, 독일의 철학자 셸러(Scheler, M.)는 인간학적인 측면에서 "자연에는 없는 神과 같은 理性力을 가지고 세계를 형성하여 이상을 실현시켜 나아가는 인간"이라고 설명하며 고대로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전통적으로 받아들여왔던 人間觀을 가리키는 말로 쓰기도 했다. 이렇게 하느님의 모상 즉 神과 같은 理性力을 지닌 이성적 인간(Homo rationalis)으로 지성인을 말한다면 인간의 여러 가지 측면 중에서도 가장 고귀하고 완성된 모습의 인간을 지향하는 것이 바로 지성인이라 할 것이다. 사람을 알려면 그 사람의 눈빛, 표정, 몸짓을 보라는 말이 있다. 눈은 영혼의 창문이라는 말도 있다.

겉으로 드러나는 사람의 모습은 단순한 표면과 형식에 그치지 않고 그 사람의 됨됨이와 인격을 보여주는 내용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렇듯 눈빛, 표정, 몸짓과 말씨는 한 인격의 표현이다. 인간이 하나의 인격체로 성장하는 데에는 많은 요소가 개입되지만 시대와 장소에 따라서 인격형성의 과정을 다양하게 표현했다. 우리의 전통문화 속에서는 유교경전 대학의 가르침이 바로 인격자의 길을 格物, 致知, 誠意, 正心, 修身, 齊家, 治國, 平天下의 8條目과 3강령(明明德 親民 止於至善)으로 표현하며, 論語에서는 仁의 가르침으로 君子나 大人의 길을 이야기한다. 현대에서는 좀더 사회적이고 심리학적인 측면을 이용하여 대체로 두 과정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우선 사회적인 존재로서 사람은 특정한 공동체에 태어나 이 공동체를 지탱하는 기본 가치와 규범과 관습을 익히는 교육인 사회화 과정을 말하며, 다음으로 이렇게 외부에서 주입된 가치들을 자신의 지성적인 능력에 따라 나름대로 조합하여 자기 것으로 만드는 내면화 과정을 이야기한다. 어쨌든 지성을 타고난 인간이 교육을 통하여 자유롭고도 책임있는 인간으로 성장할 때 인격자라는 말을 쓴다.

다시 말하자면, 사람이 온갖 행위를 함에 있어서 스스로 책임을 질 자격을 가진 독립된 개인으로 살아갈 때 그 주체를 '人格'이라 일컫는다. 인격은 본래 사람으로서 갖추어야 할 존재론적 가치와 도덕적 품성을 의미하지만, 동시에 그 존재의 품성이 드러나는 방식과 양식을 가리키기도 한다. 인격에 해당하는 라틴어 어원 persona는 본래 그리스어의 가면을 의미하는 prosophon이란 말에서 유래했지만 4 5세기에 그리스도교의 삼위일체론과 그리스도론의 논쟁을 거치면서 하느님의 위격(persona)과 인간의 인격(persona) 및 본성(natura)의 문제를 해결하고 하느님의 神性과 결부된 인간의 존엄성을 드러내게 된 대단히 고귀한 개념이다. 이 당시 persona의 깊은 의미를 밝히면서 교리문제를 해결한 아우구스티누스의 가르침에 따르면 이 말은 본성(natura) 즉 모든 행동양식의 주체가 되는 "독립된 실체로서 지성을 지닌"(substantia intellectiva) 존재이기 때문에 神을 닮은 인간의 품위와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렇게 인격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실체로서 모양과 질, 색깔, 관계, 위치 등 어떤 사람을 바로 그 사람으로서 드러내 보여주는 외면적 양식이 없이는 하나의 인격으로서 인정받을 수 없게 한다. 이것은 인간이 영혼과 육신으로 결합된 존재이기 때문에 인격적인 특성도 결국 육체를 통해서 드러나기 마련인 것이다.
나. 지혜와 예술

인격자는 지속적인 교육을 통하여 좀더 높고 깊은 지혜를 추구한다. 진리 자체가 인간을 지혜롭게 만들며 지혜는 올바른 판단력과 지식의 습득, 그리고 실천적인 의지력을 통하여 습득 할 수 있다. 이러한 지혜는 인간에게 궁극적인 행복으로 나아 갈 수 있는 길을 제시한다. 그래서 교육은 학문적 진리의 탐구와 도덕적 품성의 도야와 아울러 인간성을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가르쳐야 한다. 그것은 인간이 본래 개념적 사유능력뿐만 아니라 叡智와 藝術에 대한 심미적 직관능력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예지와 예술은 사실 모든 인간에 내재하고 있는 '인간다움'의 보편적 품성의 표현과 다를 바 없다. 우리는 자연의 조화와 아름다움을 보고 그 창조주의 능력과 지혜를 감탄하기도 하지만, 완성된 인격체에게서 나타나는 지혜와 아름다움을 찬탄하기도 한다.

사람은 이렇게 자신밖에 있는 자연의 질서와 아름다움, 그리고 자신 안에 있는 소우주인 인간성의 신비와 아름다움을 인식할 수 있는 지혜를 습득하고 심미적 직관력을 얻으며 동시에 이를 표현할 수 있는 예술적 창조력을 갖게 된다. 과거에는 철학적이고 신학적인 탐구로 지혜의 추구가 인격자의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면 근대에는 과학적인 탐색과 아울러 예술적인 조예도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또한, 예술 분야도 요즈음에는 인간의 생활에서 정치나 경제에 못지 않은 비중을 가지고 그 나름의 독자성을 부여받아 독립된 영역으로 발전되어 간다. 그리하여 정치와 경제는 전문지식을 보유한 기술관료가 담당하듯이 예술도 몇몇의 창조적 예술가의 전유물이라는 잘못된 생각이 생겨나기도 하였다. 그러나 아름다운 것을 보고 기뻐할 줄 아는 심미적 수용능력과 아름다움을 창조할 수 있는 예술적 표현능력은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으로 주어져 있고 특히 지성인의 인간다운 면모를 드러내는 한 단면 이기도 하다. 삭막한 기술문명의 폐해로 말미암아 인간성 자체가 근본적으로 위협받는 21세기에 적극 대처하기 위해서도 우리는 자연의 아름다운 질서를 감상하고 우리 내면의 본성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 심미적 안목을 키워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현대 교육의 영역에서 도덕성의 계발, 善의 구현은 무엇보다도 강조되어야 한다. 지성인은 지혜를 추구하고 예술적인 안목을 높이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는 없다. 갈고 닦아야 할 교육의 영역은 지식과 예술의 분야뿐만 아니라 우리의 생활 그 자체에도 직접적인 힘을 미친다. 물리적이고 육체적인 생활뿐만 아니라 인격적인 내면이 표출되어 나오는 지성인의 삶은 그 자체가 하나의 예술작품이며 동시에 지혜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진리와 아름다움을 찾고 표현하는 방법을 우리 삶에서 구현시켜야 하며, 그것은 우리의 德性 계발 및 善의 실천과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우리의 삶 자체가 가꾸고 다듬어야 할 하나의 예술작품이라면, 우리는 타인의 눈에 비친 자신의 삶을 관조하고 반성함으로써 하나의 인격으로 성장하고 지성인으로 드러내기 위해서 고상하고 심미적인 자기표현 능력을 필요로 한다.

지성인이 자기 자신을 하나의 인격으로 내보이는 데는 자신의 감정을 정화하고 자신의 의사를 아름답게 표현하며 올바른 생활태도를 보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대구가톨릭대학교는 자연과 인간의 내면에 숨겨져 있는 심오한 지혜와 아름다운 질서를 추리와 직관으로 파악하고 비판하며 표현할 수 있는 지성적이고 심미적인 능력의 계발을 주요 교육목표의 하나로 삼는다. 인류의 모든 知的, 理性的 활동은 인간다움에 대한 해석과 표현의 산물이다. 인간은 비록 유한하지만 영원히 남을 수 있는 가치를 창조할 수 있기 때문에 시대를 초월하는 사상과 예술작품의 고전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다움에 대한 자신의 견해나 판단력을 적극적으로 드러내고, 이것을 더욱 체계적으로 아름답게 형상화하고자 하는 지적, 심미적 안목과 표현력을 키워야 할 것이다. "지성인의 양성"이란 바로 이런 의미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다. 합리적 생활태도

지성인은 자신의 생활 자체를 갈고 닦아 예술작품으로까지 만들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가장 기본적인 것이 합리적인 생활태도를 견지하는 것이다. 현대 사회는 다양한 가치관과 신념이 공존하는 다원적 사회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모든 개인은 자신의 신념과 가치에 따라 살아갈 권리를 가진다.

그렇다면 삶의 목적과 가치관이 서로 다른 개인들이 어떻게 서로 협력하며 살 수 있는가? 근대적 민주주의가 탄생한 이후로 사람들은 서로 협력하며 조화롭게 살 수 있는 삶의 방식을 다양하게 발전시켰다. 특히, 자율성과 주체성, 개방성과 통합성, 합리성과 창의성은 민주주의의 전통 속에서 형성된 합리적 생활방식의 주요 특성들이다. 민주 사회에서 합리적 생활은 우선 자율적인 삶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자율적 인간이란 자신의 삶을 스스로 계획하고 결정하며 실천하는 자이다. 급속한 사회의 변화와 다양한 가치관은 자율적인 사람에게는 폭넓은 성장의 기회를 제공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는 오히려 혼돈과 갈등의 원인이 된다.

현대 사회는 어느 시대보다 인간의 욕망을 강하게 자극한다. 다양한 상품이 대량으로 생산되어 유통될 뿐만 아니라, 문화상품 또한 대중 언론 매체의 발달로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다. 자신의 참된 욕구가 무엇인가에 대한 주체적인 판단 능력이 없다면, 우리는 외부의 자극에 떠밀릴 뿐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살아갈 수 없다. 합리적 인간은 타인의 삶과 외부세계에 대해서 개방적이다. 중심을 세운다는 것이 폐쇄적으로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면, 자율성은 곧 개방적 태도를 의미한다. 왜냐하면 자기중심을 세운 자만이 외부세계와 능동적 관계를 맺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생각과 판단은완벽할 수가 없으며, 인간의 욕구 또한 본질적으로 다양하다. 이러한 자각은 독단의 잠으로부터 깨어나게 하여 다양한 가치들을 능동적으로 수용하게 한다.

달리 말하자면, 이것은 가치를 통합하는 힘을 의미한다. 통합의 능력이란 각기 따로따로 받아들인 다양한 생각이나 지식들을 서로 관련시켜 자기 것으로 종합하는 힘을 의미한다. 이러한 능력은 다원적 사회에서 원만한 인격형성과 폭넓은 사고, 일관된 생활을 가능하게 한다. 또한, 개방적 태도와 가치통합의 힘은 동시에 창의적인 생활을 가능하게 한다. 새로운 경험과 생각은 개방적 태도를 취할 때만 가능하다. 개방적 인간은 기존의 틀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경험을 부단히 시도한다. 그런데 새로운 경험은 항상 기존의 지식체계로는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을 포함한다. 이러한 부분들을 일관성 있게 설명하고자 한다면 사고방식의 전환은 필수적이다. 사고방식의 전환은 관습적으로 통용되는 가치들에 대한 무조건적 수용을 강요하는 권위의 파괴이다. 그러므로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는 창의성은 권위로부터 벗어나 스스로 생각하고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 능력에서 싹튼다.

현재 사회의 곳곳에서 감지되고 있는 가치관의 지각변동이 기존의 개념으로 설명되지 않는다면, 새로운 문제 해결의 가능성은 사태를 전혀 다르게 볼 수 있는 창의적 태도를 통해서만 열릴 수 있다. 대구가톨릭대학교는 합리적 생활방식, 즉 자율적이고 개방적이며 창의적인 생활을 할 수 있는 지성인의 양성을 교육목표로 삼는다. 자기 삶의 주인이 된다는 것, 타인과 사물에 대해 개방적 태도를 취한다는 것, 문제를 항상 다른 관점에서 볼 수 있는 힘을 기른다는 것은 곧 고유한 자기인격의 형성인 것이다. 따라서 자율성, 개방성, 창의성은 지성인의 생활원리이자 동시에 삶의 목표인 셈이다.

사회에 봉사하는 전문인 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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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사회적 동물(animal sociale)이다.

인간이 이성적인 동물이라는 말과 함께 인간의 사회적인 본성을 잘 드러내는 표현이라 할 것이다. 인간은 홀로 살 수 없고 가정에서부터 부락이나 도시 또는 국가, 나아가 세계라는 사회체제 아래에서 살아가기 마련이다. 인간이 보편타당한 진리인 천륜과 다양한 개성을 지닌 人道를 논하는 것도 결국은 사회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본성이 이러하기 때문에 성숙하고 완전한 인간으로 이끌어가는 교육에 있어서도 사회는 가장 중요한 요소를 차지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교육의 역사는 결국 사회의 발전과정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사회적인 특성이 교육의 양상을 결정하는 것이나 교육의 질과 양이 사회의 모습을 결정하는 것도 이와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현대 사회에서 학교의 교육목표를 설정함에 있어 현대 사회의 특징을 밝히고 거기에서 교육받을 사람들이 어떠한 역할을 하기를 기대하는지 언급해야만 할 것이다.
가. 복잡하고 불안한 현대 소비사회

현대 세계는 급속한 발전 가운데 많은 요소들이 균형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불안과 위기 의식을 조성하는 사회이다. "현대인은 위기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해도 잘못된 현실진단은 아닐 것이다." 이러한 사회의 위기의식은 바로 교육의 위기와도 연결된다고 할 수 있다. "과학과 기술이 발달하고 고도로 산업화되고 정보사회화되고 지식산업화가 촉진됨으로써 객관성·실증성·가치중심성으로 발전하게 되고 따라서 탈가치화되고 物象化된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는 목적과 수단의 관계로 비인간화되면서 탈도덕화되고 가치절대주의는 의미를 상실해 간다. 여기에 인간 실존의 총체적 위기로 나아가고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 근원하는 교육위기의 발생을 인식하게 된다."

이렇게 사회와 교육의 밀접한 관계를 염두에 두면서 우리는 현시대의 사회를 진단하고 가톨릭의 교육이념으로 올바른 교육목표를 설정해야 하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현대 사회의 특징을 깊이 연구하면서 그에 따르는 교육의 기본 자세와 방향을 설정하지 않을 수 없다. 더욱이 천륜과 인륜이라는 보편타당하면서도 다양한 진리의 초월성을 근거로 하여 "천륜과 인도를 아는 지성인 양성"이라는 목표 다음에 "사회에 봉사하는 전문인 양성"을 목표로 설정했다면 사회에 대한 좀더 깊은 연구와 검토가 필요할 것이다. 현대 사회의 이러한 위기적 증후에 대하여 현대 세계의 사목헌장은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현대 세계의 중요한 특징 몇 가지를 묘사해 본다면 다음과 같다. 오늘 인류는 그 역사의 새로운 시대를 맞았다.이 시대는 심각하고도 신속한 변화가 점차로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시대이다. 인간의 지능과 창조적 노력에 의해서 일어난 이 변혁들이 이제는 인간 자체를 변혁시키게 되었다.

개인과 집단의 판단과 욕망, 사물과 인간에 대한 사고 방식과 행동 태도에까지 이런 변혁이 반영되고 있다. 따라서 이제는 사회적 내지 문화적 참된 변혁에 대해서 말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 이것은 또한 종교생활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成長의 어떠한 위기에서나 마찬가지로 이런 변혁에도 중대한 난관이 수반된다. 예컨대, 인간은 자신의 능력을 크게 확대하면서도 그 능력을 언제나 충분히 지배하지는 못한다. 또한, 인간 정신의 가장 깊은 데를 파고 들면서도 제 자신에 대해서는 확신을 얻지 못한다. 사회생활의 법규를 점차로 보다 명백히 발견하면서도 사회생활의 방향을 제시하기는 주저한다." 이처럼 인간이 중심이 되면서도 그 인간은 내적 자아성찰이 결여된 상태에서 확신없이 표류하며 살아가기 때문에 모순된 사회현상을 초래할 뿐이다. 이를테면 "인류가 오늘과 같은 財貨와 능력과 경쟁력을누려 본 적은 일찍이 없었다. 그렇지만 세계 인구의 상당한 수는 아직도 기아와 빈곤에 신음하고 있으며 문맹자도 적지 않다.

인간이 오늘과 같이 강한 자유 의식을 가져 본 일도 일찍이 없었건만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적 내지 심리적 노예화의 새로운 형태가 대두되고 있다. 세계는 필연적 연대성을 가지고 서로 종속되어 하나를 이룬다는 의식은 생생하면서도, 서로 싸우는 힘의 대립으로 극도의 분열을 자아내고 있다. 정치, 사회, 경제, 인종, 이념 등의 극심한 분쟁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으며 모든 것을 파괴할 수 있는 전쟁의 위험도 내포하고 있다. 사상의 交流는 증대되고 있지만, 중요한 개념을 표현하는 말마디 자체는 서로 다른 이념 속에서 아주 다른 뜻을 가진다. 현대 세계는 보다 완전한 현세 생활의 건설을 열심히 추구하지만 정신적 성장의 노력이 수반되지 못한다." 개인과 가정의 문제에 있어서는 성격적인 결함이나 욕구불만의 누적, 인구 증가를 염려하는 가족계획의 부작용, 경제 및 사회생활의 여러 조건들의 重壓, 세대차에서 생기는 난관, 무질서해지기 쉬운 남녀간의 관계 등이 가정의 조화를 깨뜨리고 있다.

또한, 보다 거시적인 국가 및 민족의 차원에서도 동일현상이 초래된다. 민족과 국가의 문제에 있어서도 여러 종족들 사이뿐만 아니라 사회의 여러 계층 사이, 부강한 민족과 빈약한 민족 사이, 세계평화를 도모하려는 의욕에서 여러 국가들의 협력으로 만들어 놓은 갖가지 국제기구들조차 자기 국가의 이익 추구나 정치적인 세력 확장의 기회로 삼으려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난다. 갈수록 늘어나는 문화, 예술, 경제, 정치, 군사적 유대관계가 모든 민족과 국가의 조화와 안정을 보장하기는커녕 오히려 집단들 사이의 이기심을 북돋우며 갈등과 불균형이 자리잡는 복잡한 상황을 유발시킨다. 뿐만 아니라 현대는 소비의 시대이다. 생산방식은 대량생산체제로 바뀌었고 상품의 대량생산은 곧 상품의 대중화를 이룩하였다. 이전에 신분의 상징이었던 자동차가 이제는 대량 생산됨으로써 현대 생활의 필수품으로 대중화된 것이 그 좋은 예이다. 이제 개인의 사회적 지위와 정체성은 그가 무엇을 소유하고 있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얼마만큼 소비할 수 있는가?"에 의해 결정된다.

소비능력이 사회적 신분의 기준이자 척도로 등장한 것이다. 그런데 이 생산체제는 지속적 소비를 위하여 욕구를 자극하고 수요를 인위적으로 만들어내며 동시에 이를 충족시킬 수 있는 신상품을 끊임없이 생산한다. 인간의 자연적 욕구와 인위적 욕구의 차이가 불투명해져 어떤 것이 자연스러운 욕망인지를 알 수 없는 지금의 현상은 현대 사회의 중요한 문제로 부각되고 있다. 이와 같은 현대 산업기술사회의 복잡성과 이에 따른 가치관의 변화로 그 안에서 살아야 하는 현대인들은 어디에서 어떻게 진정한 가치와 행복을 발견해야 하는가를 알지도 못하고 또 그것을 현대의 새로운 기술이나 발전과 어떻게 조화시켜야 할지 모르고 있다. 이러한 혼란상태는 교육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문제점을 제기하며 이러한 현대 사회의 질병들을 치료 할 수 있는 가장 시급한 방법을 찾아야 한다. 따라서 희망과 불안이 엇갈리는 현대 산업사회에서 우리는 사물의 현재 진행 상황을 정확하게 판단하기 위하여 과학기술문명의 특성을 좀더 고찰해야할 것이다.
나. 과학기술 산업사회

그렇다면 오늘날의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사회현실은 어디에서 유래된 것일까? "오늘의 정신적 동요와 생활조건의 변화는 보다 광범한 변혁에 직결되어 있다. 정신 교육에 있어서는 수학과 자연과학이나 인문과학이 더욱 중요시되고 실천면에 있어서는 과학의 소산인 기술이 날로 더욱 중요시되어 가고 있다. 이런 과학적 정신이 과거와는 다른 문화 형태와 사고방식을 낳아 주었다.
기술의 발전은 이미 지구의 면모를 바꾸어 놓았고 이제는 우주정복을 시도하게 되었다." 결국 과거의 단순소박한 생활형태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고도의 과학기술문명이 우리의 사회를 복잡하게 만든 요인이 되고 또 이러한 과학기술에 인간의 정신과 생활이 적응해 나가지 못하는 데 그 원인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인간의 지성은 과학기술을 발전시킴으로써 노동력을 절감하고 많은 업무를 기계화했을 뿐만 아니라 교통과 통신의 발달로 시간과 장소의 범주를 자신의 영향력 안에 어느 정도 끌어들였다.

이것은 시간과 역사에 대한 지배권을 확대시킨 것이다. 인간은 역사의 지식으로 과거를 지배하고 推定技術과 계획설계로 미래를 지배하게 되었다. 현대의 발달된 생물학, 심리학, 인간학, 사회학 등은 인간이 자신을 깊이 인식하는 데에 도움을 줄 뿐만 아니라 과학적 방법을 이용하여 자신의 개인생활과 사회생활에 직접 영향을 미치도록 만들었다. 인류사회는 이제 하나의 공동 운명을 지니게 되므로 이미 여러 지역의 여러 가지 文化圈이나 歷史圈으로 분류될 수는 없다. 인류는 이제 靜的 세계관에서 動的 혹은 발전적 세계관으로 넘어가고 있으며, 여기서 새로운 분석과 새로운 종합을 요구하는 새로운 문제들이 방대하게 야기된다. 이러한 모든 것이 모두 과학기술 문명과 더불어 대량생산을 가능하게 하는 산업사회의 결과라 할 것이다.

산업사회의 공업화 형태는 전통적인 가족사회 및 부족사회의 모습을 흐리게 하면서 점차로 확대되어 현대 사회 특유의 집단화, 도시화를 형성한다.

이러한 변화의 정도는 나라마다 다르지만 어떤 국가들을 경제적으로 윤택하게 하는 동시에 수세기 동안 계속된 사회생활의 개념과 조건을 완전히 변질시키는 수도 있다. 또한, 이런 사회에서는 필연적으로 시골 마을과 농촌 인구가 줄고 도시와 도시인이 증가하며 심각한 이농현상을 유발시킨다. 그래서 풍요와 안락의 대명사처럼 여겨지기 쉬운 도시의 매력은 과학기술문명의 집중화 현상으로 말미암아 그 매력은 더욱 증가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과학기술은 농촌에까지도 도시 생활의 장단점을 끌어들일 수 있는 가능성을 높여주기도 하였다. 특히, 후기 산업사회의 정보 및 지식 산업의 발달은 우리 삶의 형태를 획기적으로 바꾸었다.

이미 대중화된 컴퓨터의 폭넓은 활용과 농업·공업·상업 등 각 분야의 응용 프로그램 개발은 이미 농촌과 도시의 구별이 없이 어디에서나 삶의 질을 향상하고 업무 능력을 신장시킬 수 있는 방법들을 제공한다. 아울러 신문과 방송 또는 각종 인쇄물들을 통한 정보의 교환도 대단히 활발하여 사건 전달이나 학술교류는 세계를 하나로 묶고 있다. 그리고 예술적인 재능과 감정의 표현도 대중들 안에 쉽게 알려질 수 있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은 편리하고 신속한 교통수단의 발달에 힘입어 자신이나 주변의 여러 가지 여건의 변화를 받아들이고 생활 공간을 옮기게 되며, 거기서 자기 생활양식을 바꾸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서로 생소한 사람들과의 만남이 자연스럽게 생겨나고 비슷한 사람끼리의 결속이 이루어져 인간관계는 끊임없이 변화되고 사회화의 욕구가 증가된다. 동시에 사회화(社會化=Socializatio) 자체가 새로운 인간관계를 형성하고 있지만, 그것이 언제나 마땅한 인격의 成熟과 참된 인간관계(인간화=人間化=Personalizatio)를 촉진하지는 못한다.

이러한 進化는 이미 경제 발전과 과학기술진보의 혜택을 누리고 있는 선진국에 있어서 명백히 나타나고 있다. 이제 교육을 통하여 과학기술문명을 받아들이고 공업화와 도시화의 혜택을 누리려고 희망하는 국가들은 산업사회의 혜택과 더불어 인간적인 성숙을 도모할 수 있는 방법을 함께 고려해야만 할 것이다. 사실 과학기술에서는 조금 뒤떨어졌지만 옛 전통을 가진 백성들이 보다 성숙하고 보다 인격적인 방법으로 자유를 행사하는 경향이 없지 않다.
다. 봉사를 필요로 하는 사회

과학기술과 자본주의적 산업사회의 발달은 인간의 사고방식과 생활양상을 크게 변화시켰다. 이러한 사고방식과 사회구조의 변화는 여러 가지 旣存價値들에 대한 논쟁을 일으킨다. 새로운 여건에서 생활하고 교육을 받아온 젊은이들에게 기존가치에 대한 논쟁은 더욱 심각하게 제기되며 개인적인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것을 못견디게 한다. 그래서 "젊은이들은 가끔 인내할 줄 모르고 불만을 참지 못하여 때로는 반발을 일으키는 수도 있다. 그들은 사회생활에 있어서의 스스로의 중요성을 자각하고, 될 수만 있다면 속히 사회생활에 참여하기를 희망한다. 이 때문에 부모나 교육자들은 자신들의 임무 수행에 있어서 날로 더 큰 난관에 봉착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사실 조상들로부터 이어받은 제도와 법규, 사고방식과 생활감정은 오늘날 일어나는 현실에 언제나 잘 맞는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여기서 행동태도와 행동기준에 있어서 중대한 혼란이 야기된다. 이같은 새로운 사태는 드디어 종교생활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현대 세계가 이렇게 빨리 발전하며 또 때로는 무질서하게 변혁을 유도하게 됨에 따라 調和를 잃은 세계에 대한 의식이 날카롭게 느껴지며 사회생활에 있어 모순과 갈등을 낳게 된다. 인간 외적인 이런 요소들뿐만 아니라 인간 내부에 있어서도 현대적 실천이성과 이론적 사색 사이에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불균형이 생겨난다. 현대 사회의 인간은 이론적 자기 지식의 총체를 지배하지도 못하고 그것을 체계적으로 원만히 종합하지도 못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개인은 자신의 노력에 대한 댓가를 즉시 보상받기를 원하지만 사회는 그것을 쉽게 용납하지도 않는다. 실리적 노력과 도의심의 요구 사이에도 균형이 없고, 집단생활 조건과 개인의 思索生活, 특히 개인적 취미생활의 필수조건 사이에 불균형이 생기는 수가 많다.

드디어 인간활동의 專門化와 사물의 전체적 展望 사이에도 불균형이 생긴다. 그 결과로 상호 불신과 반목과 분쟁의 불행이 생기며 인간 자신이 이런 불행의 원인인 동시에 祭物이 되고 만다. 그러면서도 인류는 피조물들에 대한 그 지배력을 날로 더욱 강화시킬 뿐만 아니라 또 강화해야 한다는 확신이 커져간다. 여기서 많은 사람들이 불의하고 불공평한 분배로써 자기 재산을 착취당했다는 의식이 강해졌고 그 재산의 반환을 강력히 요구한다. 그뿐만 아니라 정치, 사회, 경제 질서를 확립하여 인간에게 봉사하게 하고 개인과 집단이 본연의 존엄성을 유지·발전시킬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확신도 커져 갔다. 이에 따라 발전도상에 있는 국가와 최근에 독립한 신생국가들은 정치면에서뿐만 아니라 경제면에 있어서도 현대 문명의 혜택을 누리려 하며, 세계 무대에서 스스로의 役을 자유로이 연출하고자 한다.

그렇지만 더 빨리 발전하는 부강한 국가들과 저개발국 사이의 격차는 날로 커지기만 하고 前者에 대한 後者의 경제적 依存度는 높아만 가는 경우가 허다하다. 기아에 신음하는 백성들은 부유한 백성들을 향해 도움을 청한다. 남녀 동등권을 법적으로도, 실질적으로도 보장받지 못한 지역에 있어서는 여성들이 동등권을 요구한다. 직공들과 농민들은 생계에 필요한 것을 얻을 뿐만 아니라 노동으로써 인격을 발전시키고 경제, 사회, 정치, 문화 생활 조직에도 참여하기를 요망한다. 이제야 비로소 인류 역사상 최초로 문명의 혜택은 실제로 모든 사람에게 고루 베풀어질 수 있고 또 베풀어져야 한다는 확신을 모든 백성이 가지게 되었다. 이 모든 요청 이면에는 보다 깊고 보다 보편적인 욕망이 내포되어 있다. 즉 개인이나 집단이 인간 품위에 알맞은 풍요롭고도 자유로운 생활, 다시 말해서 현대 세계가 사람들에게 풍부히 제공하는 온갖 가능성을 스스로도 이용할 수 있는 생활에 굶주리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여러 민족들이 하나의 세계적 공동체를 형성하려고 날로 더욱 비상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현대 세계는 강하면서도 약하고 최대의 선을 다할 수도 있고 최대의 악을 저지를 수도 있으며, 자유와 예속, 진보와 퇴보, 사랑과 증오의 문이 동시에 열려 있다. 그러나 인간이 발굴한 힘들이 인간을 괴롭힐 수도 있고 인간에게 봉사할 수도 있으므로 이런 힘들을 바른 방향으로 이끄는 것은 인간 자신의 책임임을 스스로 자각하게 된다. "가톨릭 대학교는 현대 문화가 개인과 백성의 전반적 발전에 보다 적합한 것이 되도록 하기 위하여 그 문화의 열망과 모순을 알아내고 평가하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특별히 적절한 탐구를 통하여 현대의 기계, 기술, 그리고 특히 대중매체가 사람들, 가정, 제도 및 현대 문화의 전체에 미치는 영향력을 깊이 연구할 필요가 있다."

교회의 가르침에 의하면 현대 사회의 문제점들은 결국 인간 자신의 근본적인 문제점에서 기인한다. 아무리 학문과 예술이 뛰어나고 과학기술이 발달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지배하는 인간 자신의 내부에 분열과 갈등의 요인이 도사리고 있다면 그것을 바로잡는 것이 현대 사회를 구원하는 길이며, 동시에 인간의 행복을 보장하는 길이라 할 것이다. "사실 현대 세계가 고민하는 불균형은 인간 마음 속에 뿌리박힌 보다 근본적인 불균형에 직결되어 있다. 과연 인간 내부에서는 여러 가지 요소가 서로 대립하고 있다. 인간은 한편으로는 피조물로서 여러 가지 제한성을 체험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제 욕망에 있어서 제한을 받지 않을 뿐더러 보다 고차적인 생명으로 불리었음을 느낀다. 인간은 또한 여러 가지 유혹 속에서 언제나 취사선택을 강요당한다. 더구나 인간은 약하고 또 죄인이므로 원치 않는 일을 행하고 원하는 일을 행치 않는 수도 흔히 있다. 요컨대, 인간은 자신 안에서 이미 분열을 겪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사회의 많은 불화도 생겨나는 것이다. 그러나 실천적 물질주의에 젖은 생활을 하는 많은 사람들은 이같이 극적인 상황을 똑똑히 이해하기를 외면하고 혹 불행에 짓눌린 사람들은 이런 일에 대해서 생각해 볼 겨를도 없다. 많은 사람들은 사물의 가지가지 해석 가운데서 마음의 안식을 얻었다고 생각한다. 또 어떤 이는 인간의 노력으로써만 참되고 완전한 인류 해방을 기대하며 미래에 지상에 건설될 인간 왕국이 자기 마음의 온갖 소망을 채워줄 수 있으리라고 확신을 가진다. 또 인생의 의의에 대해서 실망한 나머지 인생의 실존 자체는 고유한 의의라곤 도무지 없지만 인간의 재능만으로써 인생에 모든 가치를 부여해 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의 용감성을 찬미하는 사람도 없지 않다. 그렇지만 세계의 현발전을 직시하며, '인간이란 무엇인가? 위대한 발전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존재하는 고통과 불행과 죽음의 뜻은 과연 무엇인가? 막대한 代價를 치르고 획득한 승리는 또 무슨 소용이냐?

인간은 사회에 무엇을 줄 수 있으며 또 사회에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 이 지상 생활이 끝나면 무엇이 따를 것인가?' 하는 가장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거나 새삼 예민하게 느끼는 사람들의 수도 날로 증가하고 있다...." 이러한 모순과 갈등 또는 불균형을 해소할 수 있는 근본적인 요소는 무엇일까? 어떻게 이기심을 극복하고 불균형을 해소하는 일치와 사랑에로 나아갈 수 있을까? 그것은 댓가를 바라지 않는 성실한 일꾼의 마음가짐, 바로 봉사정신 안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가. 봉사(奉仕 : servire)란 말의 의미

봉사란 말을 국어사전의 의미로만 볼 때에는 "남을 위하여 자신을 돌보지 않고 노력함"이나 "국가나 사회를 위하여 헌신적으로 일함 (무료봉사)"을 의미하지만 가톨릭교육의 차원에서는 훨씬 더 깊고 포괄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봉사" 즉 "섬기다"(SERVIRE)라는 말은 성서에서 두 가지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나는 인간이 하느님에게 자신을 종속시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종속되는 것 즉 노예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이 하느님께 예속되어 하느님을 섬기는 것은 하느님과 함께 하느님의 뜻대로 따르는 것이며, 이것은 사실상 진리에 순응하고 순리에 따라서 인간과 세상의 모든 것을 다스리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러한 섬김은 불완전한 인간의 해방과 구원을 가져오는 것이며, 인간에게 크나큰 영광이 되고 하느님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하느님을 섬기는 것은 인간의 소명을 다하는 것이고 인간 존재의 궁극적인 목표인 행복에 이르는 길이기도 하다.

그러나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예속되는 것은 사람을 짐승이나 물건으로 취급하는 노예제도로서 이교도의 세계에 알려진 가장 비극적이고 불행한 관행으로 성경에서 말하고 있다. 이것은 인간의 자유가 무시당하고 억압된 상태에서 섬김을 강요당하는 것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봉사라는 말을 쓰지 않고 "노예"나 "종"이라는 표현을 쓴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 세계에서는 굳이 노예나 종이 아니더라도 자발적으로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헌신하고 봉사하며 섬기는 사실을 많이 발견할 뿐만 아니라 바로 이러한 헌신과 봉사에서 크나큰 행복감을 느끼며 자기 존재의 의미를 발견하고 보람을 갖게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국어사전의 의미대로 "자신을 돌보지 않고 남을 위하여 노력"하거나 "국가와 사회를 위하여 헌신적으로 일하는 모습", 즉 왕에 대한 충성이나 공식적인 직무에 대한 헌신, 가족이나 친구들에 대한 배려,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에 대한 보살핌(자선 사업) 등이 나타난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봉사활동이 바로 "다른 사람을 섬김으로써 하느님을 섬기는 방법이다."

예수께서는 하느님을 섬기시면서 인간을 구원하시고 인간이 섬기기를 거절하는 것을 원상태로 회복하셨다. 그리고 그 분은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느님을 섬겨야 한다는 사실을 계시하셨다.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이 그들의 주님이시고 스승이신 예수께서 그러하셨던 것처럼 그렇게 하느님을 섬기면서 자신을 불태우기를 원하신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기 위하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자신의 생명을 내주러 왔다." 이렇게 가톨릭교육에서 이야기하는 봉사는 진리와 생명의 근원인 하느님의 뜻에 따라서 인간을 섬기는 자세, 따라서 어떠한 차별이나 거짓을 용납하지 않는 진리의 당위성과 인간의 존엄성에 따른 섬김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은 사랑의 개념과 밀착되어 있으며, 이 사랑(AMARE)과 더불어 가톨릭의 근본정신을 대변하는 것으로서 인간과 세상을 구원하고 행복으로 인도하는 길잡이인 것이다.
나. 가정과 봉사정신

이러한 인간 구원과 행복의 봉사정신이 인간 세계에서 가장 잘 드러나는 곳은 가정이다. 가정에서의 봉사는 새삼스럽게 "봉사"라는 말을 언급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지극히 자연스럽게 일상생활화되어 있다. 어머니가 자녀를 낳아 기르며 온갖 수고와 번거로운 일을 기꺼이 수행할 때 그것은 자기 아닌 남을 위하여 자신을 돌보지 아니하고 노력하는 본보기라고 할 수 있으며 하느님의 뜻에 따라 부모의 도리와 소명을 다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여기에는 그러한 노력에 따른 보람과 기쁨, 충만한 행복감이 찾아들기도 한다. 물론 부모 자식의 관계에서는 서로가 남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에 일반적으로는 부모의 헌신적인 보살핌도, 형제간의 우애와 사랑의 행위도 봉사라는 표현을 써서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린 시절부터 자기 욕심대로만 행동하지 않고 남의 뜻을 받들어 섬기거나 다른 사람을 위하여 헌신적으로 노력하는 것을 보고 듣고 배우지 못한다면 국가나 사회를 위한 헌신봉사도 잘 알지 못할 것이다.

인간 사회의 가장 근본적인 기초라고 할 수 있는 가정 안에서 봉사의 기본적인 의미와 실천이 수행되어야 사회의 봉사도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봉사는 미숙하고 능력이 없는 사람은 실천할 수 없다. 가정 안에서도 미숙한 어린이들은 흔히 자기 욕심대로 행동할 뿐이고 올바른 봉사를 알지도 못하고 실천하지도 못한다. 그러나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성숙한 어른인 부모나 아니면 적어도 어느 정도 철이든 형제들에게서 서로 사심없이 서로를 위해 돌보아 주고 일해 주는 모습을 관찰할 수 있다. 따라서 올바른 봉사를 알고 실천하기 위해서는 성숙한 인간의 조건을 갖추어야 하고 또한 자신이 남에게 베풀고자 하는 일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가정 안에서 어리고 미숙한 자녀들에게 베풀어 주는 부모의 사랑과 봉사는 비교적 단순하고 뛰어난 능력과 전문적인 지식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지역 공동체나 국가 또는 세계를 무대로 광범하게 활동해야 하는 현대인들에게는 봉사를 실천할 수 있는 전문적인 지식과 능력을 필요로 하게 된다.

가정교육에 이어서 사회에 진출하여 올바른 인간 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가르치는 것이 학교교육이라면 학교에서 올바른 봉사정신을 심어주고 봉사를 효과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이나 전문적인 지식을 습득시키는 것이 당연하다 할 것이다. 그러면 왜 인간은 봉사생활을 해야 하는가? 앞에서 말한 봉사의 종교적인 의미, 즉 인간이 창조주인 하느님의 뜻에 따라서 그 분을 섬기고 그 분을 위하여 다른 사람들을 섬길 때 자기 존재의 참된 보람과 가치를 깨닫고 행복감을 느끼도록 만들어진 존재가 인간이기 때문 이라고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통속적인 차원에서는 이 문제에 대하여 한마디로 간단히 대답할 방법이 없다. 다만, 인간의 존재 자체와 삶의 체험을 통해서 또 어느 정도는 선천적으로 봉사가 사랑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고 이 사랑과 봉사를 통해서만이 인간이 인간다워지고 인간의 구원과 행복에 이를 수 있다는 깨달음이 언제부터인가 인간 사회에서 인식되어 왔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이러한 깨달음이 윤리, 도덕적인 가르침이든 종교나 철학의 가르침이든 우리의 생활 속에 깊이 스며들어 있는 하나의 현실임에는 틀림없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대학교육에 있어서 사회에 봉사하는 전문인 양성을 두 번째 교육목표로 삼은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첫 번째 교육목표인 천륜과 인도를 아는 지성인 양성이라는 내용과 상호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는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성숙하고 능력 있는 인간이 올바른 봉사를 할 수 있다면 천륜과 인도를 아는 지성인이란 바로 성숙한 인간성을 제대로 받아 실천할 수 있는 마음가짐을 가진 인격자를 뜻하기 때문에 이 인격자는 자신의 성숙한 품성과 덕성을 드러내는 봉사활동에 필연적으로 나서야 할 것이다. 이것은 바로 완전한 존재인 하느님이 당신의 사랑으로 인류를 창조하고 구원하는 모범을 보이신 것처럼 가정 안에서도 성숙한 어른인 부모가 미숙한 자녀들에게 갖가지 헌신적인 봉사와 사랑을 통해서 자신과 자녀들의 행복을 지켜나가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대구가톨릭대학교는 대학교육에 있어서도 가정의 중요성을 크게 의식하며 학생들의 각 가정과 긴밀한 유대 관계 속에서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가정과 관련된 단과대학이나 학과, 연구소 등의 조직을 마련하고 있다.
다. 현대 사회와 봉사

불안정하고 갖가지 문제의식들이 도사리고 있는 현대 사회에서 우리가 교육을 통해서 추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인간이 본능적인 욕구 충족과 이기적인 목적만을 위해서 살아갈 때 행복해질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한 사실이라면 어디에서 삶의 보람과 가치를 느끼며 행복한 사회생활을 할 수 있는지 찾는 것은 지성적인 인간의 당연한 과제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인간 사회에는 일찍부터 자신의 이기심이나 욕구 충족이 아니라 타인을 섬기고 세계의 평화와 우주질서에 헌신함으로써 참된 가치와 행복감을 느끼는 실존적인 체험을 바탕으로 부각된 봉사의 의미가 사회생활 안에 자리잡고 있었다. 교육의 목적 가운데 하나가 인간의 진정한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라면 사회에 봉사할 수 있는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 바로 교육의 구체적인 목적 가운데 하나가 되어야 할 것이다. 봉사라는 말 자체가 일치와 사랑을 전제하면서 구체적인 일을 하는 것이라면 현대 세계가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것은 진정한 봉사정신을 구현시키는 것이다.

오늘날 세계의 위대한 지도자들을 아무리 많이 열거하더라도 그들의 힘과 예술적인 재능 또는 과학기술보다는 단순, 소박한 봉사정신이 더욱 현대 사회에 구원의 빛을 던져주지 않는가? 오늘날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봉사정신으로 인류에게 헌신하는 마더 데레사 같은 분이 바로 봉사자의 모델로서 사회구원의 큰 메시지를 전달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봉사"라는 말은 그 자체가 인류 구원의 메시지와 밀착되어 있는 것이다. "나는 봉사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봉사하러 왔다."("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몸값을 치르러 온 것이다": 마르 10,45)는 성경 말씀은 바로 이러한 의미를 드러내고 있다. "현대에 있어서 인류는 자신의 발명과 자신의 능력을 경탄하면서도 세계 발전의 현상, 우주 안에서 인간이 차지하는 위치와 역할, 개인 노력과 집단 노력의 의의, 사물과 인간의 궁극 목적 등에 관한 안타까운 문제들로 자주 번민하게 된다.... 인간은 구원되어야 하겠고 인간 사회는 쇄신되어야 하겠다.

따라서 인간 전체, 영혼과 육신, 마음과 양심, 지성과 의지의 결합체인 인간이 우리 논술의 중심 테마가 될 것이다.... 교회는... 진리를 증거하고, 판단하기보다는 구원하며, 봉사를 받기보다는 봉사하러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의 일을 계속하려는 것 뿐이다." 우리가 구체적인 생활공간에서 살아가며 지역 공동체에 관심을 가질 때 흔히 생각할 수 있는 일은 "어떻게 하면 좀더 많은 사람들이 인간답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이것은 우리 모두가 실현하고자 하는 사회상이며, 가장 소망스러운 미래지향적 가치관이다. 인간성의 상실과 도덕성의 붕괴는 개인이나 집단의 이기주의가 만연할 때 발생한다. 건강하고 건전한 사회를 유지, 발전시키는 일은 모든 공동체 구성원의 기본 책무이다. 봉사정신의 생활화는 자발성을 그 기초로 하고 공동체 의식을 높인다는 점에서 이러한 책무를 이행하는 데 가장 바람직한 방법이다. 자발적 봉사활동은 우선 자아실현이 그 핵심적 특성이다.

봉사활동을 통하여 개인은 자신을 사회적 존재로 자각하며, 다른 사람과 더불어 봉사하는 경험을 가짐으로써 인격적 성장을 체험하고 동시에 잠재적 능력을 실현하는 기회를 가진다. 또한, 봉사활동은 자신의 의사로 활동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발적이며 자주적이다. 아무리 도덕적으로 옳다 하더라도 의무적으로 한다면 그것은 자원봉사라 할 수 없다. 나아가 자원봉사활동은 다른 사람의 생명을 존중하고 이웃과 더불어 사는 가치에 바탕을 둔다는 점에서 이타적이다. 쉬바이쩌 박사의 아프리카 생활과 생명경외 사상은 그 대표적 본보기이다. 더욱이 사회봉사는 자기만의 삶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두가 힘을 합해 바른 공동체 사회의 구현을 목적으로 한다는 점에서 지극히 공동체적이다. 자발적으로 봉사활동에 참여하려는 자는 다음과 같은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

우선 진실되고 적극적인 자세를 가져야 하고, 자기에게 주어진 것을 다른 사람과 나눈다는 사명감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나만이 할 수 있다는 자만심을 가져서는 안된다. 봉사활동을 함에 있어 커다란 대의명분보다는 자신이 평소 관심을 가져왔던 주변의 일을 소신껏 행하는 것이 좋다. 자원봉사활동은 그 성과가 화려하거나 빛나는 일이 아니므로 공동체 의식을 가져야만 지속적으로 할 수 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소리없이 행하는 이러한 활동들은 공동체를 움직이고 지탱하며 그 미래를 밝히는 위대한 힘이다. 대학은 개인과 마찬가지로 그 지역의 구성원이다. 따라서 대학이 지역 공동체를 위해 봉사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대학의 사회봉사가 필요한 이유는 대학이 모든 것을 확고하게 가르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며, 가르치고 배우는 것보다 실천하기가 더 어렵기 때문에 사회 현장에서의 실천을 통한 학습과 자기훈련 및 타인에 대한 배려와 보호를 익히도록 하는 것이다.

봉사활동을 통해 봉사정신이 습관화됨으로써 단순히 학습에 머문 도덕심은 내면화될 수 있다. 더욱이 대학은 봉사활동을 할 수 있는 풍부한 인적, 물적 자원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대학은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고 쓰이지 않은 인간자원을 조직화할 수 있는 지도자 배출의 역할도 담당할 수 있는 것이다. 대구가톨릭대학교는 지역봉사활동에 자발적으로 참여하여 공동체 정신을 개발하고 자기를 실현하는 봉사정신의 생활화를 교육목표로 설정한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는 성서의 가르침은 곧 대구가톨릭대학교의 교훈("amare")이자 교육이념이다. 대학의 조직으로 인성교양부를 두고 "사랑과 봉사"를 가르치는 교과목들을 개설했을 뿐만 아니라 주변의 사회 봉사기관에서 자발적인 현장체험을 하도록 하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사랑은 앎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실천함으로써 완성된다.

사랑의 실천을 통하여 보편적 가치를 배우고 생활화하는 것은 자신을 뜻있게 하고, 사회를 빛나게 하며 나아가 국가를 강하게 한다. 사회가 발전하면 할수록 어두운 그늘도 그만큼 커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취적 정신으로 학문 탐구에 전력을 다하면서도 이웃을 되돌아보고 마음을 다하여 도와야 한다. 봉사는 남을 돕는 것이며 이는 곧 스스로를 돕는 길이기도 하다.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애국애족의 정신을 길러 국가의 자주 독립을 유지발전하게 하고 나아가 인류평화 건설에 기여하게 한다."는 대한민국 교육목표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라. 현대 사회의 봉사와 탐구정신

과학 발달에 기초한 산업사회의 현실은 사회영역 전반에서의 과학적 지식체계를 外延化시킨다. 이를테면 "산업사회에 있어 과학기술의 발전은 사회변동과 관련된 도구적인 또는 수단적인 의미에서뿐만 아니라 우리의 일상생활의 현실규정에 있어서도 많은 의미를 지닌다. 산업화는 전문화에 따른 노동의 분화 및 기술적 합리화를 가속시키며, 사회적 현실의 복잡성의 수준을 높여주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는 視角에 따라 多樣한 관점들이 나타나며 진리에 대한 애매모호성과 불확실성의 영역은 더욱 확대된다. 즉 과학의 발달에 따라 불가능성이나 불가피성이 현실적으로 否認되는 한편으로 과학적 지식의 認知的 지위 변화에 기인하여 사회의 전반적인 과학화가 전개된다...." 따라서 이러한 사회에서 일할 수 있는 인재를 양성하고자 할 때에는 기본적으로 탐구적인 자세의 확립이 필요하다.

묻고 답하는 탐구자적 자세는 앎의 원천이자 인류문화의 토대이다. 인간은 지성적인 존재이다. 자기 자신과 자신의 주변 세계에 대하여 끝없는 의문을 던지며 인식의 차원과 범위를 넓혀 나간다. 성경의 창조 설화에 나오는 아담과 하와의 범죄 이야기도 결국은 알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을 충동질하여 빚어진 것으로 묘사될 만큼 인간의 탐구적 자세는 본성적인 것이다. 또한,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과 완전한 행복이 하느님을 알고 누리는 至福直觀(visio beatifica)에 있다고 성 토마스 아퀴나스가 그의 신학대전에서 설명하는 것을 보더라도 인간의 탐색과 연구는 필수적인 것이다. 더구나 사회가 끊임없이 변화·발전함에 따라서 인간의 사고방식과 생활양상도 달라진다면 그러한 변화에 따라서 적응해 갈 수 있는 연구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삶의 요소라고 할 것이다. 진리를 추구하는 교육에 있어서도 현시대의 요구에 맞는 진리 추구의 자세가 필요하다.

탐구자는 참된 진리 획득을 목적으로 우주와 자연, 인간과 사회의 모든 현상들에 대해 관심을 가진다. 그는 진리 자체만을 추구하는 까닭에 맹목적인 힘의 논리, 광신적인 믿음, 정치적 이념, 전통적 권위로부터 자유롭다. 탐구자가 의지하는 것은 오직 바른 지성과 합리적 이성의 권위이다. 이성과 양심은 기존의 신념이나 통념, 일반적인 학설이나 상식을 맹목적으로 수용하기를 거부한다. 과거의 것에 대한 비판적 문제 제기, 미지의 것에 대한 끊임없는 도전은 새로운 지식 산출의 원동력이고 교육의 핵심 내용이다. 인류의 역사 안에서 이러한 탐색과 연구활동은 끝없이 이어져 왔고, 또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이다. 특히 격변하는 현대 기술문명의 사회상황 아래에서는 인간의 지성과 과학의 명료성이 "애매모호한 혼돈과 불확실성의 상태"로 나아가기 때문에 더욱 진지한 탐구자적 자세가 요청된다. 진리를 탐구하는 이론과 원리는 본질적으로 반증될 수 있는 까닭에 언제나 시대에 맞게 재해석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탐구자적 자세는 특정한 사회 안에서 영구불변한 진리의 소유를 오만하게 주장하지 않고, 모든 사람이 동의할 수 있는 토대를 언제나 어디서나 새롭게 그리고 끊임없이 추구하는 열린 태도를 의미한다. 이러한 탐구정신을 통하여 우리는 창조적 삶을 이어가기도 하는 것이다. 인간과 인간이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 자체가 하나의 완성된 모습이 아니라 살아있는 존재로서 끊임없는 물음을 던지며 해결해야 할 과제를 안고 성장, 발전, 쇠퇴해가기 때문이다. 교육의 목적도 바람직한 인간, 바람직한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라면 교육에 있어서 이 탐구자세, 특히 자기가 살고 있는 시대와 소속된 사회나 집단에 대한 탐구자세는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할 내용이다. 그러나 흔히 한 사회 안에서 기존신념에 대한 비판과 새로운 진리 추구는 기존의 진리로 인식되는 것 그 자체 때문에 위험에 처할 수가 있다.

일반 사람들의 의식구조와 사회통념은 새로운 진리를 받아들이기보다는 기존의 진리 체계 아래에서 안주하려는 경향이 있고 또 때로는 참된 진리를 왜곡하는 힘으로 작용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탐구자는 단순히 진리를 아는 것을 넘어서 진리를 수호하고 실천하고자 하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 진리는 실천을 통해 실현되고 실천은 진리를 좇아 이루어져야 한다. 진리를 알면서도 실천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의미하다. 자신의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진리를 증거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과거 유스띠노 신학교의 정신도 바로 진리를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교자 유스띠노의 정신을 따르는 것이다. 사실 진리를 수호하고 실천하고자 하는 용기는 탐구자의 기본 덕목이며, 그 이상적인 표본이 순교자 정신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교육과 순교정신의 관계도 또한 밀접하다 할 것이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가톨릭 대학교 내에서의 탐구가 "인식의 통합에 대한 모색, 신앙과 이성과의 대화, 도덕적 관심, 그리고 신학적 전망"이라는 점을 충분히 고려한 것이다.

따라서 대구가톨릭대학교는 사회에 봉사하는 전문인을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에 비판적 물음과 진지한 사색, 새로운 앎의 추구와 진리증거의 용기를 뜻하는 탐구자적 자세의 확립을 교육목표로 설정한다. 진리는 인간을 자유롭게 하고, 진리의 실천은 인간 삶을 풍요롭게 한다. 고정관념과 선입견에 묶이지 않고 항상 진리를 추구하며, 이를 통하여 삶을 혁신하려는 탐구자적 자세는 다가오는 미래 사회에서 능동적이고 창조적인 삶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마. 사회봉사에 필요한 자질과 능력계발

현대 사회의 가장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과학기술의 산업사회라는 것이다. 이러한 시대의 요청에 따라서 매사를 과학적인 방식으로 생각하고 해결해 나가지 않으면 사회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된다. 사실 인간은 과학적 태도와 합리적 사고방식을 통하여 오늘날의 기술문명사회를 이룩하였다. 인간이 무지와 폭력, 또는 미신이나 주술로부터 벗어나 자연과 인간의 여러 문제를 합리적으로 해결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과학적 사고방식과 기술의 진보 덕택이다. 우리는 삶의 영역이나 학문의 영역에서 항상 새로운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이러한 경우에 어떠한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느냐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특히, 새로운 상황과 문제점이 전통적 가치관과 갈등을 일으키거나 기존의 지식체계로 해결할 수 없는 경우에 우리는 이를 극복하고 해결할 수 있는 과학적 방법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과학적 방법이란 권위나 미신 또는 타성에 의존하지 않고 관찰과 실험 또는 합리적이고 실증적인 추론을 통해 모든 사람이 받아들일 수 있는 진리에 도달하는 절차를 말한다. 과학적 문제 해결 방식은 그 대상과 절차에 따라서 여러 가지로 나누어질 수 있다. 우선 가장 궁극적이고 초월적인 실재에 대한 것은 믿음을 통한 이해로서 모든 학문의 기본적인 바탕이 되는 公理나 계시진리에 관한 내용들이다. 만약 모든 사람이 받아들일 수 있는 이러한 기본적인 믿음의 바탕이 없다면 아무 것도 이해할 수 없게 된다. 모순율(principium contradictionis)과 인과율(principium causalitatis)을 믿지 않는다면 더 이상 할 말을 잊어버리게 된다. 하늘이 있고 땅이 있고 내가 있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면 무슨 말을 할 것인가? 주관주의의 아버지 데카르트가 확실성의 원리로써 모든 것을 의심하더라도 의심하는 그 자신은 바로 있는 것이 아니냐는 논리의 바탕("cogito ergo sum")을 이야기한 것도 바로 궁극적인 문제에 대한 믿음과 이해의 상관관계를 밝히는 것이라 할 것이다.

성 아우구스띠누스의 "이해하기 위하여 믿고 믿기 위하여 이해한다 "(crede ut intelligam, intellige ut credas)는 것도 바로 이런 경우이다. 다음으로는 어떤 사실이나 문제들을 그것이 관련되어 있는 보편적 규칙을 통해 설명하는 방식이 있다. 모든 사실들을 정확하게 관찰하고 검토하며, 그 내재적인 법칙과 변화에 따르는 상관관계를 분석하여 해설하는 자연과학적인 방법이다. 흔히 사물이나 구체적인 사건을 대상으로 하는 이런 방법은 관찰, 측정, 실험, 검증, 이론적 체계화의 과정을 거치는 가운데 개별성이나 특수성을 넘어서서 보편적인 법칙에 이르기도 한다. 이런 방식으로 새로운 진리의 발견이나 미래의 사건에 대한 가능성을 예측하기도 한다. 또 다른 하나는 법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역사적 사건을 인간의 정신적 활동이라는 전체적 맥락에서 이해하는 방식이다. 이 방식은 대체로 일회적 성격을 띠고 있는 역사적 사건을 보편적 법칙으로 설명하는 데 한계가 있다.

따라서 정신과학적 해결 방식은 특정한 역사적 사건의 의미를 전체적 맥락 속에서 해명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이것은 역사 속에 표현되는 가치를 기술하는 정신과학의 방법을 가리킨다. 어떤 의미에서는 앞에서 언급한 초월적 진리도 이러한 정신과학의 산물로 보기도 하지만 사실 그것은 자연과학적인 방법과 정신과학적인 방법을 모두 활용하여 지성의 한계와 심연을 건너뛰는 또 다른 과학적 방법인 것이다. 그런데 과학적 해결 방식은 - 그것이 초월적인 것이든 자연과학적인 것이든 아니면 정신과학적인 것이든 합리적인 체계를 갖춘 과학적 진리를 추구하는 한 - 편견과 선입견을 배제하고 보편타당한 진리에 도달하는 과정과 절차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고 있다. 과학적 방법은 우선 '주어진 사실'에서 출발한다. 믿음의 과학적 방법은 초자연적 실재를, 자연과학적 방법은 '자연현상'을, 정신과학적 방법은 '역사적 사건'을 주어진 것으로 받아들여 이 현상과 사건 또는 사실을 모든 사람이 받아들일 수 있는 일반적 원리로 환원시킨다.

따라서 과학적 방법은 과정과 절차의 합리성을 전제한다. 우리는 과학적 방법을 통해 무지와 편견을 극복하며 아울러 독단론과 회의론도 피해야 한다. 우리가 유한한 인간 이성과 나약한 믿음을 통해 획득할 수 있는 진리는 현실적으로 절대적인 차원에까지 이른다고 볼 수는 없기 때문에 그 어떠한 독단론도 참된 진리를 획득하는 데 장애가 되는 것이다. 또한, 보편적 타당성을 주장할 수 있는 진리에 대한 일반적 합의를 포기하고 혼란과 무질서를 초래하는 안이한 이론으로 "모든 것은 허용될 수 있다"는 회의론 역시 극복되어야 한다. 비록 인간의 지식이 부족하고 끝없는 미래를 향해 열려있는 것이라도 우리는 특정한 시대와 특정한 공동체에서 일반적으로 타당한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과학적 방법론과 갖가지 기술문명 사회의 결실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활용할 수 있기 위하여 대구가톨릭대학교는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의 일반적인 학습뿐만 아니라 첨단 과학을 응용하며, 현대 사회의 필수품이 된 컴퓨터, 자동차와 관련된 공과대학을 새롭게 시작하여 현대 사회에 보다 더 효과적으로 봉사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 것이다. 또한, 시대와 장소가 요구한다면 언제나 필요한 능력과 자질을 개발하여 인류와 사회에 대한 봉사에 임하고자 한다.
"사회의 속성을 구조, 기능, 통합, 안정, 균형 유지로 파악하는 기능주의는 현대 사회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첫째, 현대 사회는 업적 사회이다. 현대 사회에서 직업적 역할은 귀속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취성에 의존한다. 즉 업적 사회는 특권 및 세습적 신분보다는 개인의 능력이나 노력을 중요시하는 사회를 의미한다. 현대 사회는 대부분의 직업지위를 채우기 위해 고도로 훈련된 인력과 전문가를 필요로 한다. 그리고 산업화, 근대화에 따른 계속적인 역할의 분화는 새로운 전문직을 창출한다. 그러므로 현대 사회는 고도의 숙련된 기술과 지식을 가진 전문가에 의해 지배된다. 셋째, 현대 사회는 민주주의 사회이다.
가. 현대 사회의 전문인

현대 사회는 수많은 영역과 전문 분야로 나뉘어진 복잡한 사회이다. 과거의 전통사회에서 한 사람이 담당하였던 일들이 오늘날에는 여러 사람의 공동작업이나 여러 집단들의 협동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사회의 분화 현상에 따라서 개인이 할 수 있는 분야는 그만큼 좁아진다. 그러나 사회 전체의 차원에서 보면 모든 사회 각 분야의 유기적 연관성이 더욱 증대되고 절실하게 된다. 따라서 사회의 각 구성원들이 공동체 내에서 자기 나름의 역할을 다하고 가치있는 존재로 남기 위해서는 그 사회가 필요로 하는 전문지식을 갖추어야 한다. 이러한 전문지식은 다른 사람이나 사회에 대한 봉사를 위해서가 아니더라도 현대인이 사회적 역할을 담당하고 자신의 직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데 있어 필수적인 전제조건이다.

전통사회에서는 한 사람이 여러 역할을 담당할 수 있었으나 각 영역이 고도로 발달한 오늘날에는 이와 같은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우선 자신이 하고 싶고 또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모든 사람이 똑같이 사회적으로 높이 평가받는 일을 할 수는 없다. 아무리 고상하고 좋은 일이라고 하더라도, 그리고 부귀와 명예를 가져오는 일이라도 자신의 적성과 자질을 고려하지 않고 직업을 선택하면 보람을 느낄 수 없다. "좋은 노동"은 부와 소유를 가져다줄 지 모르지만, 진정한 보람과 의미를 주는 것은 오히려 우리가 소명의식을 느낄 수 있는 "가치 "좋은 직업"을 갖기 위해서는 거기에 필요한 재주나 능력을 습득하고 발전시켜야 한다. 흔히 전문인이라고 하면 특정한 분야의 깊은 지식과 기술을 지닌 사람을 말한다. 그러나 재주나 능력만으로 전문인이 될 때에는 오래가지 못한다.

참으로 전문가가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자신이 하는 일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가짐이다. 우리가 전문적인 기술과 능력을 지니고 하나의 직업을 소명의식으로 받아들일 때, 그 직업은 단순한 개인의 일을 넘어서서 인간 사회의 공동 연대성을 형성하는 하나의 고리가 된다. 오늘날 21세기로 넘어가는 세기의 전환기에 이루어지고 있는 가치변동은 점차 물질적 가치보다는 안정, 소속감, 보람, 자기 실현과 같은 비물질적 가치에 보다 많은 비중을 둔다. 그러므로 자신의 일을 천직으로 알고 사랑하는 태도는 현대 사회의 전문인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대구가톨릭대학교는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자신의 일"을 하며, 삶을 즐길 뿐만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봉사하며 삶의 보람과 기쁨을 느낄 수 있는 능력과 자질을 키워나갈 수 있는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고자 한다. 또한, 자신의 일을 행함에 있어 필요한 전문가적 지식과 기술 및 정의로운 직업윤리를 갖추게 하는 것을 교육목표의 하나로 삼는다.

성경을 비롯한 동서양의 고전이 전해 주듯이 행복과 평화는 사랑과 정의가 깃들이는 곳에 있으며, 정의는 근본적으로 "자신의 일을 행하는 데"서 비롯한다. 신분이나 직업의 귀천에 관계없이 자기의 취미나 특기를 살리면서 자신의 일로 전문적인 분야를 지속적으로 개척해 나갈 때 각자는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훌륭하게 봉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나. 개인의 자아실현과 사회발전에의 기여

우리가 아무리 전문적인 지식과 기술적인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하더라도 인간 사회에서 전문인으로서의 균형잡힌 인격형성이 이루어지고 자신이 바라는 자아를 실현시키지 못한다면 뛰어난 전문지식과 기술은 사회에 대한 봉사보다 인간 사회에 더욱 큰 불행과 악을 만들어낼 수 있다. 인간은 태어나서 완성된 인격체로 성장하기까지 상당한 기간과 노력을 필요로 하는 미완성의 존재이다. 인간은 신체구조의 측면에서는 그렇게 강한 존재가 아니다. 인간보다 강한 동물들과 생명체들이 얼마든지 있다. 인간의 유일한 강점은 이성과 언어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이성과 언어를 수단으로 자연과 타인과 소통하며 주변 세계를 파악하고 활용한다. 이성과 언어를 통해 서서히 하나의 주체로 성장해 가는 존재이다.

인간은 판단과 의지의 중심인 이성이 없다면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 수 없고, 사회의 부담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자신의 주체적인 생활방식과 사회의 여건을 조화시키며 합리적이고 발전적인 삶을 영위하는 전문인이라야 인류문명과 문화에 기여하게 된다. 역사적으로 사회적 합리화 내지 知性化 또는 직업의 전문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未分化 전통사회에서 인간은 지금보다 빨리 성장하였다. 습득하고 개발해야 할 지식이나 기술의 양도 많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사회 자체가 느리게 발전하였기 때문에 교육은 삶의 일정기간 동안에만 실행되는 것으로 여겨졌다. 즉 학창시절에만 교육받는다는 사고방식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사회는 복잡하게 분화되었고 전문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급속도로 변화하는 까닭에 교육은 죽을 때까지 이루어져야 하는 평생교육, 지속적인 학습사회의 방향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

과거에는 지리적인 여건과 교통수단의 제한 때문에 새로운 문물과 가치를 접할 수 있는 기간이 한정되어 있어서 삶의 변화가 적은 생활을 영위해 왔지만, 이제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상황에 대처해야 하는 현실이다. 사회가 급변하면 할수록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고 이성을 활용할 수 있는 인격적인 주체의식이 절실하게 요청된다. 현대의 풍요로운 사회가 아무리 다양한 물품과 가치들을 제공한다고 하더라도 이것들을 선택하는 것은 인격적인 주체의 몫이다. 아무리 정보가 많다고 하더라도 우리를 대신해서 인식하고 판단하고 선택하고 느끼고 행동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우리는 스스로 생각해야 하고 스스로 실천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전문적인 지식을 습득하며 끊임없는 자기 계발의 노력을 다해야 한다. 만약 우리가 스스로 변하기를 멈추고 밀려오는 정보의 물결에 자신을 내맡긴다면 결코 하나의 전문인으로서 사회에 봉사할 수 있는 길은 없는 것이다.

따라서 대구가톨릭대학교는 급변하는 과학기술의 발전과 문화적 변동의 시대에 맞추어 대처해 나갈 수 있는 전문인으로서의 자기 계발과 혁신을 고취하는 것을 주요 교육목표의 하나로 삼는다. 이러한 목표의 구체적인 실현 방안 가운데 하나로 현대 산업사회의 특징에 부응하는 최첨단 기술과 지식을 도입하여 사회에 봉사하는 전문인들을 양성하는 특징들 가운데 하나로서 우선 자동차 분야와 전산 분야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갖고 적극적인 지원을 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것은 현대 사회가 요구하는 일을 통하여 개인의 자아를 실현하는 길이며 사회발전에 기여하는 방법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대구가톨릭대학교는 때와 장소가 요청하는 전문적인 학문과 기술의 발전에 따라 교육내용과 방법을 개편하고 향상시킴으로써 대학인에게 최고 수준의 교육을, 사회인에게는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재교육을 통한 자기 충전의 기회를 제공하고자 한다. 이러한 차원에서 대구가톨릭대학교는 평생교육원을 신설하고 끊임없는 지역사회개발, 사회교육, 각계각층의 성인교양교육과 전문 분야의 지속적인 교육도 시행하고 있다.
다. 사회인으로서의 책임과 전문인의 역할

인격적인 자아실현을 이루는 전문인이 되기 위해서는 개인적인 성숙과 자기 계발뿐만 아니라 모든 분야에 대한 종합적인 판단력을 부단히 갈고 닦아야 한다. 현대 사회는 전문인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전문적인 기술과 능력이 공동작업을 벌여야 하는 경우가 많은 사회이다. 여기서 전문인은 특정 분야에서 능력이 탁월한 사람들을 말한다. 사회가 갈수록 더욱 분화됨에 따라 전문 분야도 그만큼 세분되어 간다. 그런데 흔히 전문가들이라고 하면 자기 분야에서는 뛰어나지만 다른 영역에서는 무능한 경우가 많다. 그래서 아무 쓸모없는 전문가라는 말이 생길 수도 있다. 전문가의 영향력은 아무리 특정한 영역에 한정된 지식이나 기술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사회에 적용되면 인간 삶 전체에 큰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따라서 전문가는 전문적 능력만을 갖추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되고 공동작업의 바탕이 되는 책임의식과 공동선을 위한 폭넓은 교양을 지녀야 한다. 전문적 지식의 사용은 타인과 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에 전문가는 자신의 역할과 책임을 올바르게 바라볼 수 있는 종합적 판단력과 상식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종합적 판단력은 자신의 일에 대한 사회적인 책임을 지는 데 있어서 필수불가결한 요소이다. 사실 전문가가 한 사람의 사회인으로서 사회 전체의 관점으로 자기 역할을 살펴보고, 자기 개인의 관점에서 사회전체를 내다볼 수 있는 능력은 매우 중요하다. 이러한 책임감과 판단력은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요청되는 것이지만 전문적인 영역으로 세분화된 사회구조 속에서는 더욱 절실한 덕목이다. 인간 행위는 타인이나 사회와 밀접하고도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전문가들은 주어진 사회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여 그 맥락에 합당한 역할을 다해야 한다.

특히, 기술적 전문가들은 사회적인 책임에 더욱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지금까지 뛰어난 기술이나 전문지식을 소유한 사람들은 자신의 고유한 가치가 중립적이라고 하며 그 기술과 지식의 사용으로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대하여 윤리·도덕적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었다. 그들은 기술이 인간 생활이나 자연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하기보다 항상 기술의 발전과 효과만을 중요시하였다. 그 결과 우리 사회는 메마르고 몰인정한 인간 사회의 모습을 드러내고 자연 생태계의 위기를 몰고 왔으며 미래의 세계에 대한 심각한 불안을 초래하기에 이르렀다. 현재 우리는 높은 학식과 뛰어난 기술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자신의 능력을 사용함에 있어 책임과 판단력의 결핍 현상을 보이고 있음을 알고 있다. 따라서 현대 사회의 전문가들에게는 전문지식의 올바른 사용을 가르칠 수 있는 책임과 판단력의 훈련이 그 어느 때보다 요청된다.

여기서 교양이란 하느님, 인간, 사회, 국가, 자연, 기술 등의 관계에 대한 기본적이고도 포괄적인 이해를 의미한다. 이러한 관계에 대한 이해가 바르게 이루어질 때 전문가의 지식과 기술이 빛을 발하게 되고 사회에 참다운 기여를 하게 된다. 기술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행복한 삶을 이루는 데 있다. 전문가들의 역할이 단순한 기술개발이나 활용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사회 안에서 인간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하고 행복하게 만드는 것, 즉 삶의 질을 높이는 것이 되어야 한다. 전문가가 전문가로서만 머물고 기술이 기술적으로만 사용되는 데 머무른다면 그러한 전문가는 사회에 봉사할 수 있는 사람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은 목적을 상실하고 수단에만 매달려 있는 불행한 인간의 모습이다. 이에 대구가톨릭대학교는 전문적 능력과 더불어 종합적 판단력 및 책임감을 지닌 인재 육성을 교육의 목표로 설정한다.

책임과 판단력은 앎의 문제이기보다는 실천의 문제이다. 사회에 봉사할 수 있기 위해서는 단편적 앎을 넘어서 매사를 종합적으로 분석하고 판단할 수 있는 실천적 지혜를 요구한다. 실천적 지혜는 단순히 전문적 지식의 양을 늘린다고 해서 획득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폭넓은 교양과 구체적 삶을 통해 실천하는 봉사생활의 체험을 중요시한다. 전문적 지식이 잘못 사용되어 인류사회에 비극을 초래하는 일이 없도록 대구가톨릭대학교는 단순한 기술 본위의 전문가가 아니라 사회에 봉사하는 전문가의 양성을 목표로 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대구가톨릭대학교의 교육목표는 "자유를 사랑하고 책임을 존중하며 신의와 협동과 애경의 정신으로 조화있는 사회생활을 하고자 한다."는 내용을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것이다.

인류구원에 헌신하는 진리의 증거자 배출

인류구원 헌신

인류구원 헌신

인류구원 헌신

인류구원 헌신

진리의 증거자

진리의 증거자

진리의 증거자

진리의 증거자

진리의 증거자

진리의 증거자

진리의 증거자

가. 인간이란?

가톨릭교육이 젊은이들에게 올바른 가치관에 입각하여 균형있게 성장하고 전인적인 발전을 도모하도록 하는 것이라면 인간에 대한 관심과 탐구는 교육의 가장 핵심에 자리잡고 있다. "신체의 건전한 발육과 유지에 필요한 지식과 습성을 기르며 아울러 견인불발의 기백을 가지게 한다."는 말처럼 우리 나라의 교육목적에도 인간의 신체와 정신에 대한 배려가 첫째 자리를 차지한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높은 이상과 목표를 지니고 살아가기 위해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것은 아주 오랜 역사 속에서 전승되어 온 가르침이다.

"후직은 백성들에게 농사법을 가르쳤는데 오곡을 씨뿌려 가꾸게 하니 그 곡식이 여물어 백성들이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살아가는 방도란 배불리 먹고 따뜻하게 입고 편안하게 산다고 하더라도 교육이 없다면 금수에 가까운 것입니다. 성인은 바로 그 점을 근심하여 설에게 사도의 직책을 주어서 인륜을 가르치게 하였던 것이니, 어버이와 자식 사이에는 친밀함이 있어야 하고, 임금과 신하 사이에는 의리가 있어야 하고 남편과 아내 사이에는 분별이 있어야 하고, 나이 많은 사람과 어린 사람 사이에는 순서가 있어야 하고, 친구 사이에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인간을 잘 알아야만 한다는 것이 교육의 가장 기본 바탕임은 분명하다. 그런데 인간이 인간을 깊이 고찰하면 할수록 인간이 일반적으로 불완전하고 비참하고 불행한 존재임을 알게 되는 것이 시대와 장소를 초월한 깨달음이다. "인류가 시작된 이래로 어느 시대 어느 인종을 막론하고 인간 자신에 관한 관심을 缺했던적은 없었다.

계몽주의 시대에 칸트(1724-1804)는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인식론), '나는 무엇을 행해야 하는가?'(윤리학), '나는 무엇을 바랄 수 있는가?'(신학)라는 철학의 근본 물음 세 가지를 묻고는 그 모든 것을 종합하는 한 가지 물음으로 '인간이란 무엇인가?'라고 물었었고, 이미 로마 제국시대 말기에 아우구스티누스(354-430)는 자신이 평생에 걸쳐 알고 싶은 두 가지는 신과 자기 자신이라고 힘주어 강조했다. 그리고 이미 철학의 여명기에 프로타고라스(c.488- 415 BC)는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고 주장했고, 또한 철학의 아버지인 소크라테스(470-c.399 BC)는 인간의 자기 자각을 철학적 탐구의 중심으로 삼았다. 오늘날 우리는 나라 안팎에서 심각한 문제들을 접하고 있다. 정치, 경제, 도덕 등 사회 각 분야에서 전례없이 파괴적인 불안한 상황을 만나게 된다. 인간 문제는 사회적, 과학적, 도덕적 발전이 복잡하고 모순적인 양상을 보여주고 있는 오늘날 가장 긴급한 쟁점이 되고 있다. 인간 문제는 사회적, 과학적, 도덕적 발전이 복잡하고 모순적인 양상을 보여주고 있는 오늘날 가장 긴급한 쟁점이 되고 있다.

특히 건전한 가치관의 파괴로 인한 人間性 상실의 문제,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발생한 엄청난 환경 파괴 등은 가히 인류 전체의 존폐의 위기감마저 느끼게 한다." 따라서 오늘날 교육을 이야기하는 데 있어서 과학기술이 발달한 현대 사회에서는 인간이 발휘할 수 있는 특정 능력이 문제되는것이 아니라 인간적 삶의 質에 대한 문제가 중요하게 부각된다. "근대인은 물질적 과학기술의 향상 발전이라는 목표에만 눈을 빼앗긴 경향이 있었으나, 현대의 우리에게 중요한 문제는 과학에 의하여 '인간이 과연 얼마만큼의 일을 해낼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아니고 그와 같은 기술을 갖게 된 현대인이 '인간으로서 어떻게 존재할 것인가'라고 말하는 것일 것이다. 물론 그 자신의 내부에 있는 자연 속에는 어두운 욕망과 정염, 죄와 악의 원천이 숨어 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에너지의 영역은 인간의 내면에 있는 정신의 빛과 보다 높은 것에 대한 동경과 崇敬의 念까지를 포함하여 간직하고 있는 선악이 뒤섞인 불가사의한 영역이기도 하다."
나. 인간성과 인류 구원

이러한 인간의 모습을 성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인간은 스스로 똑똑한 체하지만 실상은 어리석습니다. 그래서 불멸의 하느님을 섬기는 대신에 썩어 없어질 인간이나 새나 짐승이나 뱀 따위의 우상을 섬기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이 자기 욕정대로 살면서 더러운 짓을 하여 서로의 몸을 욕되게 하는 것을 그대로 내버려두셨습니다. 사람들은 하느님의 진리를 거짓과 바꾸고 창조주 대신에 피조물을 예배하고 섬겼습니다"(로마 1,22-23). 인간의 본성이 선한 것이냐 악한 것이냐 하는 데 대한 논란은 맹자의 성선설과 순자의 성악설로 알 수 있듯이 동양문화권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논란의 대상이 되어 왔고 그에 따라 교육의 방향도 크게 달라졌다고 볼 수 있다.

한국의 전통사상은 성선설을 유교의 정통사상으로 보며 선한 인간의 본성을 확충하여 실천하도록 하는 것이 교육의 중요한 흐름이었지만 서양의 그리스도교 사상에 있어서는 선한 인간 본성이 원죄의 타락으로 오염되어 악한 경향을 지니고 그러한 죄악의 불행으로부터 벗어나야 하는 인간의 구원 문제를 깊이있게 다루고 있다. "인간이 하느님을 알아보려고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올바른 판단력을 잃고, 해서는 안 될 일들을 하게 내버려두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온갖 부정과 부패와 탐욕과 악독으로 가득차 있으며 시기와 살의와 분쟁과 사기와 악의에 싸여서 없는 말을 지어내고 서로 헐뜯고 하느님의 미움을 사고 난폭하고 거만하며 제 자랑만 하고 악한 일을 꾀하고 부모를 거역할 뿐더러 분별력도, 신의도, 온정도, 자비도 없습니다. 그런 모양으로 사는 자는 마땅히 죽어야 한다는 하느님의 법을 잘 알면서도 그들은 자기들만 그런 짓들을 행하는 게 아니라 그런 짓들을 행하는 남들을 두둔하기까지 합니다"(로마 1,28-32).

결국 성경에서는 인간 조건을 비극적인 현실로 표현하며 구원을 절실하게 필요로 한다고 말한다. "나는 내가 하는 일을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내가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일을 하면서도 그것을 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곧 율법이 좋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일을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속에 도사리고 있는 죄입니다. 내 속에 곧 내 육체 속에는 선한 것이 하나도 들어있지 않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마음으로는 선을 행하려고 하면서도 나에게는 그것을 실천할 힘이 없습니다. 나는 내가 해야 하겠다고 생각하는 선은 행하지 않고 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하는 악을 행하고 있습니다....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육체에서 나를 구해줄 것입니까?"(로마 7,15-25). 이러한 성경의 가르침을 전하는 그리스도교의 전통을 받아들이는 대구가톨릭대학교는 인류 구원을 위해 헌신하는 인재를 양성하는 것을 중요한 교육목표로 삼지 않을 수 없다.
다. 인류 구원에 헌신하는 길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은 인간이 죽음에 이르는 자신의 불행한 조건을 극복하고 구원에 이르는 길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며 그 진리를 따라야 한다고 가르친다. 따라서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으로 이 세상에 파견되어 인류를 구원한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서 그 분의 인류 구원 사업에 동참하는 길이 가능하게 된다. "하느님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구해 주십니다"(로마 7,25).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능력은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의 힘인 성령을 통하여 이루어지고 있다. 그런데 이 예수 그리스도의 인류 구원을 위한 가르침이 바로 사랑과 봉사이다. 사랑이라는 주제는 인류사회에서 대단히 친숙하고도 널리 쓰이는 말이다. 그러나 그 의미는 대단히 다양하고 복잡하여 자칫하면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도 있다.

사실 사랑의 가장 고차적인 의미는 그리스도교의 인류 구원에 대한 가르침에서 잘 드러나며, 그리스도교의 하느님 자신이 바로 사랑이란 말로 표현될 지경이다. "그리스도교의 사랑은 구약성경에서부터 인간의 모든 실존적인 관계에서 유래하는 사랑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그보다 한 차원 더 높은, 위로부터 은총으로 내리는 사랑의 계시가 주어진다. 이 계시는 인간 역사 안에 자리잡으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 그 정점을 이루어 황제의 권위나 모든 폭력을 능가하는 위대한 사랑의 힘이 드러나고 부활로써 인간의 실존적인 삶을 초월하는 길이 사랑에 있음을 보여준다. 그 결과 역사의 온갖 위선과 폭력에 시달리면서도 그 옳고 그름은 정치권이 아니라 하느님의 계시와 그 계시를 밝혀주고 가르치는 예언자들에 의해 또한 성령의 인도를 받는 하느님 백성의 공동체에 의해 진정한 사랑의 길이 제시되었다 할 것이다. 그것은 또한 인간의 궁극적인 목적과 가치를 전해주는 영원한 생명의 길이기도 한 것이다.

이러한 사랑은 단순한 이론만이 아니라 생활의 실천이며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처럼 너와 나와 그가 모두 하나가 될 수 있는 일치의 인류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라야 할 것이다." 또한 이 사랑은 불교의 대자대비나 유교의 仁과도 그 근본적인 의미에 있어서 상당히 유사하지만 문화적인 배경과 어감의 차이를 무시할 수는 없다. "다산과 함께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인 이벽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仁人으로 보아, 세상을 감화시키고 변화시켜 구원으로 인도하는 구세주로 보는 것이다. '仁人의 美德은 天下를 感化하기에 이르게 된다.' 이벽은《聖敎要旨》2장에서 구약의 義人 노아의 이야기를 하며 죄에 물든 인간 조건, 비참한 인간실존 속에서 멸망과 구원의 방향을 제시한다. 그는 인간 상호관계의 크나큰 장벽이 되면서 동시에 인간과 하느님 사이의 관계를 단절시키고 마는 온갖 죄악들, 미움, 반역, 불목, 싸움, 잔인, 살상, 탐욕, 포악, 배은망덕 등으로 야기된 비참한 인간 조건을 하느님의 뜻에서 벗어난 인간 원죄의 결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는 노아를 의인이라고 하며 그에 의해 인류가 전멸을 면하고 홍수로부터 구원되었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이 의인이란 말은 孔子의 仁을 孟子가 仁義로 확대해서 설명한 것으로 보아 어진 사람(仁人)은 자신의 덕으로 모든 사람과 온 사회 전체를 구원하게 된다.... 그러나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완전하고 의로운 사람(仁義人)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그 정점을 이룬다.... 고로 기독교라는 것은 세상의 복을 더해 주시고자 예수를 내려보내신 것이니 사실 그는 구세주이시며....(성교요지 3장 1-4). 이렇게 이벽이 노아의 홍수와 그로부터의 구원을 이야기한 다음 즉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그 인격을 이야기하는 것은 의도적으로 예수의 구원 사업과 어진 인물로서의 특징을 분명히 드러냄으로써 유학사상에 젖은 한국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물을 성인으로, 또 구세주로 받아들이고 그의 가르침을 자연스럽게 따르도록 인도하기 위한 배려일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참된 행복을 갈망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인류 구원에 헌신하는 길은 궁극적인 진리를 추구하는 종교의 가르침 안에서 사랑과 봉사의 삶을 선택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생명을 누리게 하는 성령의 법이 나를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시켜 주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본성이 약하기 때문에 율법이 이룩할 수 없었던 것을 하느님께서 이룩하셨습니다."(로마 8,2-3).
가. 초월적인 진리

예수 그리스도의 인류 구원을 위한 길, 즉 하느님의 말씀과 은총의 진리는 자연과학이나 인류 역사의 진리가 아니라 종교적이고 신학적인 진리이다. 이것은 인간의 경험과 실험에 의해 입증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권위로서 증명되는 초월적인 내용이다. 이러한 진리를 증명하는 길은 순교자들처럼 자신의 목숨을 바쳐가면서까지 그 진리를 믿고 따른 신앙의 증거자들이 걸어간 길이다. 그리고 이 신앙의 증거자들 가운데 대표는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을 증거하기 위해 십자가의 죽음도 거절하지 않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또한,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며 박해를 받아 목숨을 바친 순교자들도 있고 평생을 독신으로 지내며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대로 인류 구원을 위해 헌신하는 가톨릭교회의 성직자들과 같은 증거자들도 있다.

이러한 증거자들을 배출할 수 있도록 특별한 교육과정과 훈련 프로그램을 마련하고 교육하는 것이 또한 대구가톨릭대학교의 신학부이다. 그러나 인류 구원을 위해 헌신, 봉사하는 진리의 증거자들은 가톨릭교회의 성직자들뿐만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활동하는 일반 사람들도 역사의 섭리와 대자연의 신비 앞에 위대한 창조주의 뜻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며 생활에서 실천하고자 할 때 그 나름대로 인류구원에 헌신하는 것이며 또한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초월적인 진리를 증거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초월적인 진리라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독단적인 인물들을 양성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느님의 진리를 끊임없이 생활 속에서 선포하며 비판적인 안목으로 참된 진리를 추구하는 인물을 키우는 것을 교육목표 중의 하나로 삼는 것이다. 왜냐하면 초월적인 진리라고 하더라도 구체적인 인간의 삶 속에서 이 세상의 문제로 등장할 때에는 항상 개방된 진리의 문제로 등장하며 끊임없이 탐구하고 재해석하는 가운데 하느님의 영원한 뜻(초월적인 진리)이 밝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나. 진리에 대한 개방적인 비판능력

우리는 지금 급격한 변화의 시대에 살고 있다. 정치체제와 국제정세, 경제제도와 생활수준, 교육내용과 사고방식, 사회구조와 가치기준, 문화환경과 의식구조 등 우리의 생활은 전면적으로 바뀌고 있다. 이러한 급격한 변화는 최근에 이르러 더욱 더 가속화되고 있으며, 이전에는 체험하지 못한 충격적인 문제들이 다양하게 표출되고 있다. 세대간, 계층간, 국가간의 갈등은 그 어느 때보다 복잡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변화는 언제나 새로운 질서의 정립을 요구하며 변화된 사회조건으로 인하여 기존질서의 타당성이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가 인류 구원에 기여할 수 있는 건강하고 올바른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모든 문제를 진실되고 정의롭게(verum et justum) 해결해야 한다. 옳고 그름의 기준이 확보되지 못한다면 어떤 일에도 타협과 합의는 불가능하다.

진실과 정의가 모든 문제 해결의 근본 척도이며 사랑과 구원도 진실과 정의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개인과 개인간의 문제 해결에서도 진실과 정의의 원칙이 지켜져야 한다.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주장을 강요하거나, 혈연과 지연의 끈에 호소하거나, 공적인 지위를 남용하는 방식등의 부당한 방법으로 사적인 문제를 해결하려 해서는 안된다. 개인간의 문제는 강제적 수단보다는 대화와 타협을 통해 해결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대화는 근본적으로 타인을 인정하는 가운데 문제가 무엇인가를 합리적으로 확인하고 해결하려는 시도이다. 이러한 과정에 부당한 힘이 개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비판적이고 정의로운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

그리고 문제 해결의 과정이 정의로울 때에만 그 결과는 수용될 수 있고 책임도 물을 수 있다. 너무나 안이하고 타성적인 자세로 하느님의 초월적인 진리에 의존한다는 태도는 독선적인 오류를 범하기 쉬우며 심각한 거부반응을 야기시킬 수 있다. 세대와 세대간의 문제도 진실과 정의의 원칙에 따라 해결해야 한다. 오늘날 기성세대와 새로운 세대간의 갈등은 사회의 변화 속도만큼이나 심각하다. 일반적으로 기성세대는 억압의 상징으로, 새로운 세대는 저항의 세대로 비춰지기가 쉽다. 그러나 전통이 새로운 시대에 대해 반드시 억압적인 것은 아니듯 이 새로운 세대 역시 기성세대에 대해 무조건 저항해서는 안된다. 세대간의 화해는 우선 상호인정에서 출발해야 한다. 각각의 삶의 조건과 생활방식에 대한 이해와 인정은 화해의 첫 걸음이다.

기성세대는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가 정의롭고 합리적일 때 "권위"의 힘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신세대의 비판적 태도에 개방적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신세대도 새로운 가치관이 역사적 정통성을 갖춘 전통의 맥락 안에서만 올바르게 구현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창의적 비판에 대한 개방적 수용과 전통에 대한 합리적 인정은 세대간 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 지름길이다. 이러한 사실에 비추어 대구가톨릭대학교는 현대 사회의 진실과 정의의 문제들에 대하여 창의적인 비판능력을 키우며, 영원한 진리의 빛에 비추어 참된 삶의 길을 증거하는 것을 중요한 교육목표로 삼는다. 민주사회는 대화와 타협을 통한 합의에 기초하지만 모든 진리가 민주주의적인 방식에 의하여 결정될 수는 없는 것이다.

고양이의 암수를 구별하기 위하여 과학적인 관찰과 객관적인 사실의 진실성 여부를 고려하지 않고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합의나 다수결만으로 결정한다는 것은 그릇된 것이다. 진정한 합의는 진리를 바탕으로 하는 정의로운 방식에 의해 이루어질 때 모든 사람에게 수용될 수 있다. 그러므로 진리에 대한 증거와 정의감은 특정한 계층의 견해와 이해관계를 관철하고자 하는 전체주의에 저항한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는 것이지만 때로는 대다수 민중들의 뜻에 벗어나는 진리를 증거할 수도 있어야 하는 것이다. 과거 순교자들의 삶이 이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여기서 민주주의란 말의 한계를 볼 수도 있다. 우리는 민주주의와 민주적인 생활방식을 존중하고 그 가치를 충분히 인정하면서도 영원하고 초월적인 진리를 수호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사실 진정한 민주주의는 이러한 진리에 상반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진리를 증거하기 위하여 목숨까지도 바칠 수 있는 순교자나 증거자의 자세는 대중들의 뜻을 거스르는 것 같으면서도 참된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뿌리이다. 특히, 오늘날처럼 다양한 관점의 진리와 가치들이 상호경쟁하는 다원적 사회에서 진실과 정의를 염두에 둔 발전적인 비판능력은 민주적인 복지사회 건설에 견인차 역할을 한다.
다. 민주적 시민의식의 함양

현대 사회에서 인류 구원을 위한 진리의 증거자를 언급하고자 할 때 중요한 요소중의 하나는 이러한 증거자들이 자신의 무지와 독선에 사로잡혀 참으로 영원하고 초월적인 진리를 증거한다는 착각에 빠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현대 사회의 건전한 삶을 영위하는 시민의식을 갖추어야 한다. 이러한 민주적 시민의식은 다른 누구보다도 궁극적인 진리를 증거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우선적으로 필요한 자질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지도자에게 주어진 정치적, 사회적 권력은 근본적으로 국민으로부터 위임된 것이다. 국민이나 백성들의 뜻이 하늘의 뜻임은 상고시대로부터 우리 민족들의 의식 속에 뿌리 깊게 자리잡고 국가없는 국민이 없듯이 국민의 권리를 초월하는 국가의 권력도 존재하지 않는다. 민주국가의 국민은 누구나 그 나라의 주인이다

민주국가에는 지배하기만 하는 사람도 없고 지배를 당하기만 하는 사람도 없다. 모든 국민은 지배하는 자이자 동시에 지배를 받는 자이다. 지도자와 공동체 이 둘은 서로가 서로를 도와주고 견제하는 것이다. 이것은 국민과 국가, 그리고 국민 서로간의 관계가 자발적이며, 권리와 책무가 동시에 주어짐을 의미한다. 따라서 민주적 시민의 제일 덕목은 권리의 주장과 동시에 자신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것이다. 그러한 책무는 국가사회나 그 사회 속에 존립하는 각종 조직 사회의 구성을 규정하는 법에 의해 본질적으로 규명된다. 자유 민주주의 사회를 보장하고 다양한 조직사회의 운영을 위해 필요한 법이 지켜질 때, 그 사회는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민주적 시민의 제일 덕목인 권리의 주장과 의무의 이행은 준법정신에서 시작된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의 해방과 구원을 위한 첫 걸음에서 모세의 율법, 십계명이 이스라엘의 민족과 국가 건설의 기초가 되었던 것이다. 준법정신에 기초한 권리와 의무의 수행이 민주주의의 관건을 이룬다면 민주주의는 정치나 사회제도의 원리이지만 동시에 생활방식의 원리를 의미한다. 생활원리로서 민주주의는 우선 개인의 동등한 인격적 존엄성을 절대시한다. 얽혀진 이해관계에서 어느 누구도 특별대우를 받을 수 없고, 어느 누구도 부당한 차별을 받아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이해관계의 대립, 의견의 충돌, 신념의 갈등이 발생할 때 민주적 시민은 상호 이해와 존중의 정신으로 공정하고 적법하게 다양한 마찰을 극복, 해결해야 한다. 이러한 민주주의의 바탕은 모든 인간이 다같이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고유한 영혼을 지니고 아무도 손상시킬 수 없는 지극히 고귀한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를 부여받았다는 데서 비롯된다.

그리고 민주주의는 개인의 목적과 욕구의 실현을 위한 기회를 균등하게 배분함을 원칙으로 한다. 이것은 곧 평등의 정신이다. 사회 구성원들의 가치와 의사는 언제나 균등하게 존중되어야 한다. 문제 해결에 기여할 수 있는 생각이나 능력은 많든 적든간에 누구나 소유하고 있다. 어떤 사람은 보다 합리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고 또 어떤 사람은 그렇지 못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모두 정도의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좋은 생각을 제시할 수 있는 잠재적 능력이 있다. 그러므로 의사표현과 욕구실현의 기회는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균등하게 주어져야 한다. 성격이나 지식 정도의 차이 또는 육체적, 정신적 능력의 차이가 인격적인 불평등을 초래하고 부당하게 인간의 존엄성이 유린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

동시에 민주주의는 구성원 모두의 자율적 참여와 합의를 중요하게 여긴다. 공동의 문제는 관련된 모든 사람이 적극적이고 성실하게 참여할 때 능률적으로 해결될 수 있다. 인류 구원 또는 인간 개인의 구원 문제도 자신의 자유의사를 거슬러서 이루어질 수는 없다. 이러한 과정에 자율적으로 참여하지 않는 사람은 그 결과에 대해서 불만을 표시할 자격이 없으며, 동시에 잘된 결과로 인한 이득도 주장할 수 없다. 나아가 정당한 절차와 과정을 통하여 합의되고 결정된 것은 전체 뜻의 반영일 뿐만 아니라 개인 의사의 자유로운 반영이기도 하다. 여기에는 결정에 찬성한 사람의 의사뿐만 아니라 반대한 사람의 의사도 포함되어 있다. 왜냐하면, 반대한 사람은 그러한 결정의 절차에 동의함으로써 결정될 결과를 따르겠다고 약속한 셈이기 때문이다.

민주시민은 공동의 문제에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정당한 절차를 통해 합의되고 결정된 것은 반드시 준수해야 한다. 대구가톨릭대학교는 인간 존엄성, 자유와 책임, 준법정신, 상호이해와 존중, 기회의 균등, 자발적 참여와 합의의 준수를 그 내용으로 하는 민주적 시민의식의 도야를 교육목표로 설정한다. 오늘날 사회는 고도로 분화되어 개인과 개인, 집단과 집단의 분리가 심화되고 있다. 그리고 개인의 자율이 강화됨에 따라 개인들간의 이해관계도 매우 복잡해지고 있다. 그런데 어느 누구도 공동체를 떠나서 살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하다면, 이러한 민주적 시민의식은 생활원리로서 정착되어야 한다. 인류 구원은 개인적인 차원만이 아니라 공동체의 차원에서도 이루어진다고 볼 때 올바른 민주시민의 자질을 갖추어야 초월적인 진리를 증거하고 헌신할 수 있다. 이러한 자질은 대학생활에서부터 충분히 익혀나가야 한다.
라. 생명 윤리와 자연보호정신

자연은 영원한 진리를 반영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진리의 증거자는 자연과 우주에 대한 경외심을 지니고 자연 생태계를 존중하고 보호할 수 있는 마음가짐을 지녀야 한다. 21세기는 본질적으로 기술시대이다. 기술이 아직 발전하지 않았던 시대에 자연은 인간에 대해 상당한 힘과 권력을 행사하였다. 근대에 들어와 인간은 발전된 과학과 기술 덕택으로 자연에 대한 지배력을 지니게 되었다고 믿는다. 자연이 반영하는 창조주와 절대자를 무시하면서 인간이 자연의 지배자요 소유자인 것처럼 착각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21세기의 과학과 기술은 점차 인간의 손에서 벗어나 자율적으로 발전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으며, 인간의 삶에까지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정도에까지 이르렀다. 그 결과 과학과 기술은 자연을 파괴하면서 인간의 생명과 문화까지 위협하기에 이르고 있다. 인간의 실존을 위협하는 기술문명의 폐해를 극복하기 위해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자연과 인간 모두에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기술권력을 통제할 수 있는 윤리, 도덕적 힘이다. 새로운 시대에 요청되는 생명 윤리는 인간의 유일한 거주지인 지구가 하나뿐이며 서서히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각종 공해나 원자력 발전장치의 사고가 말해주고 있듯이 기술문명의 폐해는 모든 생명체에 치명적인 손상이나 죽음을 가져오고 그 범위도 특정한 지역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전 지구와 우주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엄청난 파괴력을 갖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인간뿐만 아니라 지구도 생명력을 상실할 수 있으며 그 존재까지도 소멸될 수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고, 인간의 파괴적인 기술과 개발행위를 통제할 수 있는 새로운 차원의 생명윤리와 도덕규범을 발전시켜야 한다. 생명의 위기와 자연의 파괴에 대한 인식은 그 위기를 극복하고자 하는 실천적 노력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무엇보다 먼저 선행되어야 하는 것은 이러한 위기의 원인을 정확하게 진단하고 분석함으로써 생명과 환경윤리의 지침과 원리들을 정립하는 것이다. 오늘날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환경보존의 필요성을 느끼고 환경운동을 벌이지만 뚜렷한 지침이나 규범도 없이 기분에 따라서 그때 그때의 환경보호를 운운하는 경우가 많다. 인간과 자연을 조화롭게 연결시킬 수 있는 참된 규범은 인간의 진정한 행복과 존재 가치가 자연보존과 더불어 획득될 수 있다는 확고한 신념에서 비롯되어야 한다. 인간의 기술이 생명에 봉사하고 대자연의 흐름을 조화롭게 가꾸어 나갈 수 있는 방향으로 개발될 때 인류의 미래도 밝은 전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대구가톨릭대학교는 생명의 존엄성과 윤리의식을 지니고 자연보호정신이 투철하게 새겨져 있는 인재들을 양성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대구가톨릭대학교는 기술시대에 필요한 인간다운 삶이 제자리를 찾아가도록 배려하며, 현실적으로 의과대학과 약학대학을 중점적으로 지원하는 가운데 인간생명 위기에 대한 구체적인 원인규명 및 치유를 위한 종합적인 대책을 모색해 나간다. 또한, 자연대학의 여러 학과들에서도 자신의 고유한 영역뿐만 아니라 타학과와 교류하며 새로운 종합학문으로서의 '환경학'에 큰 관심을 갖도록 한다. 이것은 과학의 한계가 점차 드러나고 있는 현대 산업사회에서 바람직한 인간의 삶을 어떻게 실현할 수 있는가 하는 총체적 문제를 다루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인간생명의 위협과 환경공해의 위기를 여러 가지로 분석하며, 생태학적 이론과 실천을 정립할 수 있는 종합적 관점을 개발해야 한다. 이것은 결국 창조주의 초월적인 진리에 대한 증거자의 역할로서 나타나야 할 것이다.

"진리 탐구의 정신과 과학적 사고력을 배양하여 창조적 활동과 합리적 생활을 하게 한다."는 말도 바로 이런 진리의 증거자 역할을 강조하는 것이다.
마. 문화적인 생활태도의 구현

진리의 증거자는 다양한 문화적 생활양식을 수용하고 그 가치를 인정하는 가운데 보다 더 궁극적인 발전 단계로 이끌어가야 한다. 문화(culture)란 말은 라틴어의 "밭갈다, 경작하다"(cultura)라는 말에서 유래하여 사람이 밭을 경작하여 곡식이나 채소와 같은 작물을 생산하는 것처럼 인간이 자기 자신의 본성(nature)과 외부세계의 자연(nature), 즉 인간 본성이나 세상 사물들을 갈고 닦아서 어떤 목적이나 생활이상을 실현하려는 모든 활동과정 및 그 과정에서 이룩해 낸 물질적 정신적 소득을 모두 가리킨다. 따라서 진리의 증거자는 필히 문화에 대한 관심을 가져야 한다. 사실 문화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학문, 예술, 종교, 도덕 등 인간의 내적 정신활동의 所産을 말하기 때문에 교육의 일차적인 목표에 속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대한민국 교육목표에도 "민족 고유 문화를 계승 앙양하며, 세계 문화의 창조, 발전에 공헌하게 한다"거나 "심미적 정서를 함양하여 숭고한 예술을 감상, 창작하고 자연의 미를 즐기며 여유의 시간을 유효히 사용하여 화해 명랑한 생활을 하게 한다"는 말이 있다.

이러한 문화의 바탕을 이루고 문화창조의 원동력이 되는 것은 인간의 본성 안에 타고난 욕망과 갖가지 욕구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욕구나 욕망이 제멋대로 분출되어 나온다면 그것은 문화가 아니라 바로 원시적인 야만 그 자체이다. 따라서 문화라고 할 때에는 이러한 개인과 집단의 욕구가 통제되고 분해되고 조절되어 인간과 사회에 쓸모있는 것으로 가꾸어져 가야 하는 것이다. 특히, 자기 자신의 몸과 마음을 돌보는 개인적 수양과 절제, 근검 절약의 생활태도는 훌륭한 문화창달의 행위이며 인간과 자연의 궁극적인 의미를 밝히는 증거자의 태도이기도 하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다양한 욕구 가운데서 자연스러운 것과 인위적인 것을 구별하고, 후자를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성을 실현하고자 하는 욕망으로 승화시킬 때 우리는 비로소 문화적 생활양식을 갖게 된다고 할 수 있다. 절제의 태도는 인간의 다양한 욕구를 통합하고 조화롭게 통제할 수 있는 하나의 통일적 가치를 가질 때 비로소 형성된다.

욕구의 강압적인 억제가 삶 자체를 파괴한다면 욕구의 무분별한 충족 역시 인간 삶을 야만의 상태로 전락시킨다. 욕구에 매몰되어 있는 삶은 노예의 상태에 불과하며, 무의미한 욕구의 대량생산은 야만의 文明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자신만의 가치를 설정하고 이를 통해 다양한 욕구를 의미있게 조화시킬 수 있는 삶의 양식은 욕망의 무조건적 충족이 아닌 욕구의 승화를 요구한다. 자신의 고유한 생활방식 자체가 문화라고 한다면, 우리는 외부의 욕구에 단순히 반응하지 않고 자신에 적합한 방식으로 이를 추구할 때 비로소 욕구의 승화가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근검 노작하고 무실역행하며 유능한 생산자요 현명한 소비자가 되어 건실한 경제생활을 하게 한다."는 의미가 여기서 살아남음을 볼 수 있다. 대구가톨릭대학교가 대량소비시대에 적합한 문화적 생활양식을 받아들이면서 보다 더 건전하고 행복한 삶을 마련할 수 있는 방향 제시를 교육목표 가운데 하나로 삼은 것이 "진리의 증거자"라는 말 안에 함축되어 있다.

인간의 본성을 실현할 수 있는 객관적이고 영원한 진리의 빛에 따라서 자신의 "주관적 가치"를 설정하고 이를 중심으로 다양한 욕구를 조화롭게 충족시킬 때 우리는 비로소 문화적 삶을 영위할 수 있다. 대학인은 자기 자신과 타인 안에 깃들어 있는 다양한 욕망과 가치를 이성적으로 가늠할 수 있는 지적인 안목을 갖추어야 하고 동시에 그것을 영원한 진리의 빛에 비추어 갖가지 욕망을 자기 실현의 자원으로 이용할 줄 아는 지혜를 닦아야 한다.
바. 사랑과 봉사의 실현

우리는 현대를 흔히 세속화의 시대라고 부른다. 인간의 삶과 행위를 규제하였던 중세의 신중심주의의 절대적 가치가 타당성을 상실하고 인간적 가치에 의해 대체되는 시대라는 뜻이다. 근대의 인간은 실제로 초월적인 것, 즉 "우리가 알 수 없는 것"은 제쳐두고 내재적인 것, 즉 "우리가 알 수 있는 것"만을 집중적으로 탐구함으로써 현재의 기술 문명을 발전시켰다. 그러나 인간의 인식영역은 "우리가 알 수 없는 것" 또는 초월적인 진리의 배경 위에서만 뚜렷이 나타난다. 근대 계몽주의의 대표적 철학자인 칸트 역시 "신", "인간의 영혼", "세계의 질서"는 인간의 인식능력을 넘어서지만 우리의 사유와 실천을 이끄는 "규제적 이념"이라고 실천이성에서 말한 바 있다.

과학이 아무리 발전하였다고 해도 인간의 본성, 자연의 법칙, 신의 섭리는 여전히 우리에게 물음표로 남아있고 여기에 하나의 답변을 제시하는 선험적 또는 초월적 진리의 초대를 받기 마련이다. 우리는 우리의 현실과 내재적인 가치들을 고찰할 때에 그것만을 최고로 생각하는 절대적 위치로부터 한 걸음 물러서서 자신을 상대화할 때 비로소 관용을 베풀 수 있다. 우리의 지식과 능력이 아무리 발전하여도 "우리가 알 수 없는 영역"은 그대로 남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우리는 겸손할 수 있고 관용할 수 있으며 절대자를 수용할 수 있게 된다. 21세기는 인간을 절대화하였던 인본주의적 계몽주의가 한계에 부딪히는 시대이다. 이 시대는 또한 인간이 스스로 자신을 파괴할 수 있다는 인식으로 인해 절대자에 대한 마음을 다시 열어 놓는 시대이기도 하다. 가톨릭교육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모범과 인격을 근본 바탕으로 삼는다.

본래는 선하고 아름답고 진실되게 창조된 인간이었건만 죄악의 씨앗이 떨어져 온 인류가 죄와 죽음의 불행에서 신음할 때 이러한 인류의 비참한 운명을 극복할 수 있도록 구원의 길을 열어준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고 하신 말씀을 십자가의 죽음으로 실천하여 온 인류에게 참 사랑과 봉사의 모습을 보이신 것이다. 이것은 절대자인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순종과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하고자 하신다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소서.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소서." (루가 22,42; 마태 26,39; 마르 14,36). 현대와 같은 시대에서는 그리스도교의 사랑과 봉사의 정신만이 자기파괴적 성향을 띠고 있는 인간행위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우리는 우선 인간에 의해 젖혀졌던 절대자에 대한 사랑을 일깨워야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교적 사랑의 핵심은 하느님의 뜻이나 가르침에 대한 순종이다.

인간 행위는 본래 자발적이고 우연적인 까닭에 우리는 자신의 행위에 대해 완전히 책임을 질 수 없다. 인간 행위의 올바른 길잡이로 제시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고 그 안에서 인간완성과 존재목적을 달성하는 것이 순종의 의미이다. 하느님이 우리가 책임질 수 없는 행위를 용서하시는 것도, 숱한 오류를 저지를 수 있는 우리의 연약한 삶을 받아들이는 것도 바로 하느님의 뜻이 완전히 성취될 때까지 기다리는 사랑의 마음이다. 인간은 쉽사리 죄를 범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하느님의 용서를 쉽게 받으며, 따라서 다른 사람들에 대한 용서도 쉽게 베풀도록 초대받고 있다. 성서는 하느님에게 용서를 구하기 전에 서로를 용서해야 한다고 거듭 말하고 있다. 우리가 타인을 용서해야 하는 이유는 인간은 자신이 행하는 것을 알지 못하며 따라서 누구라도 잘못을 저지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서로 용서할 때에만 사랑을 실천할 수 있고 효과적으로 봉사할 수 있으며 서로가 서로를 구원으로 인도할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사랑과 봉사의 행위는 모든 학문연구와 교육활동에서도 영원한 진리를 증거하는 행위가 되는 것이다. 또한 이것은 완전하고 영원한 미래의 행복에 대한 희망을 안겨주는 것이다. 대구가톨릭대학교는 가톨릭교의 사랑과 봉사정신에 기초하여 인류 구원을 위한 진리의 증거자가 될 수 있는 헌신적인 삶의 구현을 교육목표로 설정한다. 우리가 불완전하고 불행해 질 수도 있는 현세에서 기쁨과 보람을 누리며 살아가기 위해서는 영원한 진리인 하느님께 헌신하고 동료 인간들에게 그 삶의 기쁨을 증거해야만 할 것이다. 우리는 남을 용서함으로써 자신을 용서받을 수 있으며, 남을 자유롭게 함으로써 자신도 자유로울 수 있으며, 남에게 구원의 진리를 증거함으로써 자신도 구원 될 수 있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그 나름대로 하느님의 진리에 이르는 길임을 믿고 영원한 희망을 가지고 헌신 봉사할 때 참으로 하느님 나라의 행복이 사랑 안에서 피어나게 된다. 이 때에 우리는 眞善美의 人間世界를 具顯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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